111023 말과 경주하는 인생 (렘12:1-6)
성경본문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시베리아 북쪽 북위 60도 이상 북극해에 가까운 지역을 툰드라 지역이라고 말합니다. 그 지역에 사는 종족들에 관한 기록영화를 보았습니다. 거기에 순록과 더불어 살아가는 부족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네네츠((Nenets)족이 있습니다. 일 년 사시사철을 순록과 더불어 이동합니다. 연중 대부분의 기간은 눈이 덥혀있는 겨울이에요. 짧은 봄과 여름이 있고 그 외에는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있는 곳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순록을 잡아 먹습니다. 생식을 합니다. 잡기가 무섭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껍데기를 벗겨요. 그것을 옷으로 입어야 그 추위를 견딜 수 있기 때문이죠. 다 둘러 모여 생식을 합니다. 어린아이들, 어른 할 것 없이 다 피를 마셔요. 야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비타민과 모든 영양을 공급받는 것이지요. 아무 때나 순록을 잡지 않아요. 꼭 필요할 때만 잡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순록이기에 그들의 세계관은 순록과 연결되어 있어요.
또 '춤'이라고 순록의 가죽으로 덮은 텐트를 만들어서 삽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반드시 다 걷어내서 이동합니다. 매번 이동하는 일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닐 터인데 어김없이 이동합니다. 유목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단 한사람도 할 일이 없는 사람이 없어요. 순록과 연결된 모든 일은 남자들의 일이고 ‘춤’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여자들의 일로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어요. 남자아이가 일곱 살만 되면 벌써 아빠를 흉내 내면서 올무를 다루며 순록을 낚아채기도 합니다. 자기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수천 년 지탱해 오는 것도 너무 신기하지만 그 안에도 삶의 질서가 있고 그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나고 죽어가는 인간의 일생이 순록과 더불어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름도 순록의 이름을 따라 짓고 종교도 순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분명한 문화인류학적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며 또 그것을 전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해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어둠이 찾아오면 춤 안에 모여 들어 함께 생활을 하는데 거기에 TV가 있어요. 물론 배터리를 이용한 것이겠지만 TV모니터 앞에서 가족들이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덧 현대문명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지요. 소련이 공산화 되면서 많은 부족들은 공산주의 정책에 의해서 이동하던 유목민족의 생활을 빼앗기고 집단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수천 년 동안 지탱해 온 삶이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전통이 붕괴되기 시작했어요. 순록을 쫓아다니면서 하던 일을 빼앗긴 남자들은 실직 상태에 놓여있게 되었고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정체성을 잃어 버렸어요.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순록 전문 사냥꾼들이 인정사정없이 순록의 씨를 말리고 있는 것이지요. 시베리아가 자원개발을 시작하면서 가스 석유공장들이 세워지고 도로가 나고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위기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걸어가는 것도 힘들어한다면 달리는 말과 어떻게 경주하겠느냐' 예레미야 당시 유대는 물질문명에 깊이 빠져들었어요.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가나안의 바알 신을 섬기는 것이지요. 바알 우상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욕망을 형상화한 우상을 섬기는 것이고 또 물질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 바알 신을 섬기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을 다 잊어버리고 언약을 외면했어요. 돈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저들을 책망합니다. 그러자 고향사람들을 비롯해서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가족들도 예레미야를 핍박합니다. 예레미야가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까지 내가 하나님께 물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정확한 응답을 주셨는데 하나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저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물을 드리고 예배드리는 겉모습은 갖추었는지 모르지만 저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어떻게 저들이 저렇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까? 악인이 어떻게 저렇게 형통할 수 있습니까?" 너무 마음이 상해서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저들을 양을 잡아서 죽이듯이 그렇게 해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이 모든 고통과 아픔은 저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이 아닙니까? 심지어 저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철저하게 하나님이 없는 것같이 행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가 너무나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과 갈등을 쏟아놓는 것이지요. "네가 오늘 그만한 어려움을 가지고도 그렇게 괴로워하고 힘들어 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어마어마한 심판을 어떻게 감당하려 하느냐 지금 다른 사람과 달리기 경주하는 것도 힘들어서 헉헉거린다면 달리는 말과 같은 심판과 고통의 시대가 올 때 어떻게 이겨내려 하느냐 네가 과연 말과 함께 달리기를 할 수 있겠느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말과 달려 이길 수 있는 인생이 되라' 고 말해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곧 유대민족에게 엄청난 심판이 와요. 바벨론의 침략이지요. 강대국 바벨론이 일어나서 유대를 침공해 버리지요. 유대가 망하는 거지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거지요. 70년 남의 나라에 끌려가서 고통당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불순종하는 백성들이 겪게 될 하나님의 심판이지요.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고 하는 거지요. '말과 함께 달리는 인생이 되라' 고 하는 것은 '격심한 심판과 고통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보라'고 하는 것이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눈을 들어서 모든 인생과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그림을 보라고 하는 것이지요. 성경과 역사에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가 하는 것이 잘 드러나 있지요.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동안 저들은 마음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었어요. 유다는 망했고 예루살렘 성벽은 다 무너졌고 그들이 목숨같이 소중하게 여겼던 예루살렘 성전도 다 무너졌어요. 바벨론 강가에서 저들은 수금을 나뭇가지에 걸었다고 했어요. 맘대로 찬양하고 노래할 수 없어요. 그저 속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놀랍게도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은 잃어버린 세월이 아니었어요. 껍데기 신앙에 물들어 있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혹독한 연단을 통해서 가난한 마음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어요. 이제까지 자랑했던 허세를 다 걷어 주시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화려한 성전이나 요란한 업적이 아니라 인생의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깊이 알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모하는 상한 마음인 것을 깨닫게 하셨어요. 예레미야나 에스겔과 같은 바벨론 포로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말씀을 주셔요. '내가 너희에게 새 영을 부어 주리라. 새 마음을 부어 주리라'
여러분, 우리가 사는 동안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은 많이 있을 수 있지만 전쟁을 피해 우리의 일상을 마음껏 살수 있다고 하는 건 놀라운 특권이요, 은총이에요. 전쟁은 그저 우리 편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대의 목숨도 빼앗고 재산도 빼앗고 모든 것을 다 빼앗고도 무감각해지는 거예요. 인간 죄악의 극치죠.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어린아이도 누구도 보호 받을 수 없죠. 우리나라도 6.25를 겪었습니다마는 그 이후 우리나라가 이만큼 일어나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에요. 이렇게 마음대로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에요.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을 통해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우리의 낮아진 마음이고 가난한 마음이에요.
바벨론 포로생활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생각의 폭을 넓히셨어요. 이제까지 하나님은 그저 유대 민족의 하나님이었어요. 그런데 바벨론 포로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를 주장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하나님은 그저 우리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계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고백을 가지게 되었어요. 우리의 신앙이 그저 나 하나 먹고 사는데 매여 있다면 그런 좁은 안목으로는 하나님의 온전한 은총을 제대로 발견하기 어려워요. 하나님은 모든 인생과 만물과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하루를 계획하고 일 년을 계획하고 십년을 계획하듯이 하나님도 당연히 계획이 있어요. 우리 각자를 향한 계획이 있어요. 우리 공동체를 향한 계획이 있어요. 민족과 세계를 향한 계획이 있다고 하는 것에 눈을 떠야 됩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이후 130년 동안의 역사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 역사 속에 가장 극심한 고난이 있었어요. 나라를 빼앗기는 위기가 있었어요. 또 기근이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일본사람들의 억압과 압제를 피해서 만주로 연해주로 다 떠나갔어요. 중국본토로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 멕시코까지 갔어요. 흩어짐의 역사는 6.25 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어서 가난을 벗어버리려고 서독 광부로도 가고 간호사로도 가고 남미 농업 이민으로도 가고 드디어는 미국으로도 흩어졌지요. 그 안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어요. 오늘 한국이 이만큼 위상이 높아져서 세계 사람들과 나눌 때가 되었는데 알고 보니 이미 지난날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들어간 많은 사람들이 길잡이가 되었어요.
중국에 선교를 하러가는 분들은 이미 조선족들의 도움이 있기에 선교가 되어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에요. 소련에 연해주로 끌려갔다가 스탈린 시대에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흩어져 살았던 고려인들이 있었기에 오늘 러시아 선교가 이루어져요. 일본은 가장 선교가 안 되는 나라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가난 때문에 일본에 들어간 소위 언니들이 있었어요. 술집으로 팔려간 여자들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야쿠자들과 더불어 살던 여인들 가운데 그 고통과 저주스러운 삶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회심한 사람도 있어요. 그런 여인들을 통해서 야쿠자가 회심을 하고 목사가 된 케이스가 있어요. 어느 선교사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너무 달라요. 사람들은 얼마나 가졌는지, 얼마나 배웠는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앉아 있는지를 가지고 인생을 평가하려 하지만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서 너무나 오묘한 섭리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역사하셔요. 술집에 팔려가는 여자가 무슨 그런 생각을 했겠어요? 그저 고통과 저주였겠지요. 그러나 그를 통해서 어둠의 세계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은총과 빛이 임하는 사건들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어요.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눈이 먼 것이지요. 우리의 눈이 어두운 것이지요. 130년 한국의 역사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였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야말로 또 한 번 그러합니다.
다른 사람의 핍박을 받아야만 고난이 아니에요. 세속주의 만큼 무서운 고난이 없어요. 어떤 위기와 가난과 어려움 속에 있었다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찾았을 사람들이 손에 좀 쥔 것이 있다는 것 가지고 잘못 판단해서 이것이 내 인생의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길 잃은 인생이잖아요. 현대인이야말로 욕망에 붙들린 인생 이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신다면 당장 손을 놓고 세상 떠날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 사명을 붙들고 사는 삶, 이게 바로 말과 더불어 달리는 인생이에요. 모든 인생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어요. 사명을 발견하고 사는 사람이 있고 사명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사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 때 아무리 고난을 받아도 무의미한 고통이 돼버리고 마는 거예요. 사명을 가지고 살 때 고난은 결코 헛된 고난이 아니에요. 사명을 붙들어야 되요. 사명이 인생이에요.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느냐?' 그 한마디 물음에 '나는 이것 때문에 산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스티브잡스 자서전이 곧 발매된다고 합니다. 자서전의 내용들이 조금씩 보도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더라고요. "자기가 만약에 컴퓨터에 인생을 걸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파리에서 시를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했다고 해요. 굉장히 감성적인 사람이지요. 하기는 기계 같이 굳어져있는 머릿속에서 어떻게 창조적인 감성이 나겠어요? 그는 아주 감성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이죠.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 다 하고 돌아다니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아서 인생의 가치를 남기기 위해서 그중에 하나를 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컴퓨터였고 거기에 내 인생을 다 쏟아 부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고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짧은 인생 속에 내가 다 할 수 없어요. 한가지, 내 모든 삶을 쏟아 부어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택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직종에서 일하건 어디에 살든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로서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사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들고 사는 거예요. 어찌 스티브 잡스같이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천재만 그렇게 살겠습니까? 아니요.
한 십 년 전인가요? 여러분, <우체부 프레드>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았습니까? 미국 덴버시에 사는 프레드라는 우체부 이야기에요. 이 사람은 평생 그 우체부 옷을 입고 운전하면서 소포들을 날라주는 일을 했어요.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일을 하는 것 같았지만 자기의 온 마음을 담아서 고객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 사람으로 유명하지요. 특별한 일을 한다고 해서 특별한 사람이 되는 거 아니에요. 이미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면 충분해요. 거기에 온 마음을 들여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으로 붙들고 기도하면서 일을 하는 것, 그게 삶의 예배요, 그게 거룩한 삶이요, 거기에 내 인생의 가치가 있어요.
참 하나님은 공평하셔요. 잘 배웠든 못 배웠든지 모든 남자와 여자를 다 만나게 하시고 결혼하게 하시고 자녀를 낳게 하시고 아빠가 되게 하시고 엄마가 되게 하셨어요. 아빠 엄마라고 하는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 사명은 어떠합니까? 내 자식이기에 내가 책임져요. 성격이 못돼 먹었거나 어쨌거나 간에 내 자식이기에 내가 책임져야 되요. 그게 바로 알고 보면 사명 아니겠어요? 그것 없었으면 방종하고 흩어졌을 인생들을 하나님이 엮으시며 대를 이어 온 게 아니겠어요? 그런 육신적인 사명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영적인 사명이 있어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잖아요. ‘이제까지는 네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네 열심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고 했지만 이제부터는 누군가 너의 허리를 묶고 너를 그 허리끈으로 이끌어 가리라' 성령이 이끌어 가실 것을 얘기한 거예요. 놀라운 얘기에요. 이제까지는 내 열심으로 살았어요. 이제는 하나님께서 영으로 내게 오셔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고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나를 이끌어 가실 때 마음을 모아서 들으세요. 베드로가 옆에 있는 동생 같은 요한을 보면서 예수님에게 묻지 않습니까? 자기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갔을 때 요한은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이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거두어 준 사람이지요. 요한을 볼 때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서 수제자를 자처했던 자기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물어요. "주님! 저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셔요? "그를 내가 다시 오는 그날까지 살게 한다 할지라도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서로 비교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에요. 아니요.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요.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이끌어 가셔요. 형제와 이웃을 돌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 이전에 먼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사명을 붙들고 가야 할 것이에요.
여러분, 또 우리 교회는 자카르타 한인공동체를 섬기며 이끌어가야 할 시대적인 사명이 있어요. 저는 내년에 있을 세계기도성회를 철저하게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 시대적인 사명과 연결해서 생각해요.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무슨 행사를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한국을 삼십 년 전에 세계기도성회를 통해서 이제까지 응답해 주셨다면 다시 인도네시아를 통해서 새로운 사십년을 열어 가시면서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것을 통해서 회교선교의 큰 문을 여실 터인데 어쩌다가 우리에게 이런 복을 주셨는지 한국의 부흥을 목격하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시고 다시 이 땅에 나와서 살면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시작하시는 이것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죠. 우리를 이 일에 부르셨어요. 내가 뭐 열심히 하는 것, 죽을 인생들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라 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얼마 전에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 한 편을 읽었습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이제까지 억지로 이끌려 왔던 인생이라면 이제는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맡겨주신 사명에 응답하는 인생으로 살아갈 때 저와 여러분에게 복이 있고 복된 교회가 되고 한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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