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1113 청지기의 지혜 (눅 16:1~10)[불의한 재물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귀하게 쓸 때]/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0. 16. 08:05

 

111113 청지기의 지혜 (눅 16:1~10)

성경본문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어려운 비유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상당히 어려운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 청지기가 나옵니다. 청지기란 주인이 자기의 많은 종들 가운데 똑똑하고 일을 맡길만한 사람을 뽑아 다른 종들을 관리하게 한 사람이죠. 이 사람은 주인에 대해서는 종입니다만 다른 종들에 대해서는 주인을 대리하는 사람이죠.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고 주인의 농토를 다른 종들에게 소작을 주고 소출을 거두는 일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의 청지기는 ‘불의한 청지기’로 불립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 사람이에요. 주인에게 그런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네 하던 일을 정리하고 그만 두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더 이상 일을 맡길 수 없다고 해고 통보를 한 거예요. 쫓겨나게 됐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제 나가서 일을 하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낸 해결책이 어떤 거냐? ‘주인에게 빚진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혜택을 주어서 나중에 내가 쫓겨났을 때 도움을 받아야 되겠구나’하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덜어주었어요. 탕감해준 것이죠. 정말 옳지 못한 청지기죠. 그런데 주인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냉큼 불러서 곤장을 치던지 했어야 될 것 같은데 뜻밖에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놈 참 일을 영리하게 처리했구나’ 하고 칭찬을 했다고 하는 것이죠. 이 비유는 여기에서 이야기가 뚝 끊어집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 청지기가 쫓겨나지 않고 다시 일을 맡았는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쫓겨났는지 뒷이야기가 참 궁금해요.

 

어떤 분은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석했어요. 주인이 왜 칭찬을 했을까? 아마도 주인은 청지기를 통해 종을 부리고 소작을 주어 해마다 가을에 수확은 넉넉하고 곡간에 쌀가마니가 가득 쌓여 있지만 동네에 나가보면 사람들의 시선이 영 싸늘합니다. 청지기가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사람들을 몰아 붙여서 소출을 많이 거두니까 말이죠. 주인이 돈은 많이 벌었습니다만 영 동네사람들의 태도가 거친 거예요. 여기에 주인의 갈등이 있어요. 돈도 많이 벌고 싶고 소출도 많이 거두어들이고 싶지만 또 명예도 얻고 싶은 거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공손해졌어요. 얼굴이 환해요. 알고 보니 청지기가 저들의 빚을 덜어줬다는 거예요. 길을 지날 때마다 소작인들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절을 하는데 싫지 않아요. 그래서 주인이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칭찬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분도 있어요.

 

이 비유가 워낙 어려워서 어떻게 하든지 논리에 맞게 해석하려고 하다 보니 이런 해석도 나온 것이죠. 그러나 여러분, 비유를 해석할 때 세세한 내용들이 다 우리 입맛에 딱 맞아 떨어지기를 기대하면 안돼요. 비유에서 초점은 하나에요.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핵심을 가지고 풀어야 되는 거예요. 일일이 꿰어 맞추려고 해서는 안돼요.

 

오늘 비유의 주제는 ‘지혜 있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특별히 말세에 지혜롭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특별히 지혜를 강조합니다. 잠언에 보면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찾으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지혜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심지어는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 이런 표현도 있어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 얼마나 부지런하냐’ 그런 것이죠. 잠언 30장에 보면 가장 작으면서도 지혜로운 것 네 가지를 드는데 그중에 하나가 개미입니다. 또 하나는 오소리를 들어요. 별로 강한 것 같지 않은데 바위 틈에 집을 짓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 또 하나는 메뚜기, 임금은 없지만 떼를 이루어가지고 움직이므로 메뚜기를 무시했다가는 큰일 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도마뱀이에요. 밤낮 잡힐 것 같으면서도 용케 붙들리지 않고 왕궁에서 사는 것, 그것 참 지혜롭다 이렇게 말해요. 심지어는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 말씀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뱀은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죠. 이 나쁜 것으로부터도 지혜를 얻으라.

 

‘반면교사’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원래 중국 사람들이 쓰는 말이에요. 못된 모습만 보여주는 선생님이 있어요. 선생님이 다 좋을 수 없잖아요. 여러분도 학교 다니던 시절에 그랬잖아요. 저에게도 그런 분이 있었어요. 아주 못된 모습만 보여주는 선생님이었어요. 그런 분을 반면교사라고 그래요. 그런 악한 모습을 통해서도 지혜를 얻어라 이거예요. ‘나는 저러지 않겠다’ 이게 반면교사죠.

 

그럼 오늘 청지기의 지혜는 어떤 것이냐? 대책을 세웠다고 하는 거예요. 주인에게 잘못을 지적 받았을 때 변명하지 않았어요. 애원하지 않았어요. 그대로 인정했어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의 문제가 뭐냐 하면 변명하는 것입니다. 때로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그러면서 그 죄를 반복합니다. 거짓말이 무섭잖아요. 잘못했을 때 빨리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좋았을 것을 그만 변명하다가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나중에는 점점 커져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청지기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모습이죠.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습니까?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 청지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허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건만 알지 못한 무지, 또는 듣고도 순종하지 않은 불순종, 인생을 낭비한 거예요. 시간을 낭비한 거예요. 인정해야 돼요.

 

청지기는 주인에게 ‘넌 더 이상 일할 수 없다’는 해고통보를 들어요. 쫓겨나게 됐어요. 종말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언제까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즘 여자분들의 평균 수명은 이미 팔십세를 훌쩍 넘었어요. 남자들의 수명도 머지않아 팔십을 넘길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확률일 뿐이에요. 저는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직 충분히 젊은데도 덜컥하고 한순간에 세상 떠나는 것을 봐요.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에요. 또 팔십을 살고 구십을 산다 할지라도 오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내일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오늘 밝은 빛 아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어둠 가운데 이어질 삼십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그러므로 남은 기회를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죠.

 

사실 청지기는 다른 종들과 소작인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권한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유익을 저들에게 베푼 것이죠. 오늘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사람이 어리석어서 자기가 하는 일은 시시해 보여 온 맘을 쏟아 신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다른 사람이 멋지게 하는 일이 부럽지만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니 할 수 없어요. 그럼 어쩌자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이에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최고의 일이에요.

 

<The Fred Effect>라고 하는 책이 있잖아요. ‘우체부 프레드 이야기’, 미국 덴버시에 산다는 우체부. 우리 나라 우체부는 오토바이 타고 다니고 미국의 우체부들은 차를 몰고 다니는 정도의 차이지 본질은 똑같지 않습니까. 제복을 입고 물건을 날라주는 일이지요. 그러나 <우체부 프레드> 책을 읽어보세요. 간단한 내용이에요. 자기 구역 안에 들어와 있는 주민들이 자기 고객이에요. 물건만 날라주는 게 아니라 새로 전입한 사람을 찾아 가서 인사도 하고 친절하게 안내하지 않습니까? “선생님 이사 오셨습니까?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습니다. 선생님의 소포나 편지를 정확하게 배달해드리겠습니다. 혹시 멀리 여행을 가신다든지 할 때 미리 알려주시면 선생님에게 온 소포나 편지를 따로 보관하든지 해서 나중에 전해드리겠습니다.” 지나친 친절 같지 않아요? 하도 세상이 험악해서 그것도 믿을 수 없어요. 왜 이렇게 과잉친절을 베푸는가? 요즘같이 프라이버시를 앞세우는 사회에서는 같은 아파트에 몇 년을 살아도 누가 사는지 얼굴 한 번 제대로 기억하지 않아요. 이러한 삭막한 현실에 결국 그 피해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오는 거죠. 그런데 이런 친절을 베풀잖아요.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그를 알게 된 작가가 감동을 받아가지고 그 우체부 이야기를 쓴 거 아니겠어요? 미국의 많은 기업들이 ‘프레드 상’을 만들어서 고객이나 동료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을 선발해서 시상하자, 이런 열풍이 일어나기까지 했잖아요? 여러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이에요. 하나님은 그 일속에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셔요.

 

청지기가 대책을 세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청지기는 자기가 관리하는 재물을 가지고 대책을 세웠다. 예수님의 결론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맡겨주셨다. 사실 내가 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벌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기회도 주신 거죠. 하나님이 맡겨주신 거죠. 그렇다면 내게 재물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라는 거예요.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유익하게 하라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읽어보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죄의 뿌리가 된다고 말해요. 돈 자체가 죄라고는 얘기하지 않아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다 알다시피 수원지에서 출발하는 물은 깨끗하지만 우리 집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더러워져 있어요. 왜? 파이프가 낡고 녹슬어가지고. 돈은 중립적이라고 말하지만 돈을 쓰는 사람들은 너나 예외 없이 다 녹슬어 있어요. 돈을 만지는 사람이 온전하고 깨끗해질 수 없어요. 그러기에 오늘 주님이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불의한 재물’이라고. 돈이 불의해서가 아니에요. 돈을 다루는 우리가 불의하다 보니 결국에는 돈도 불의해지는 거예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잠언 23장에 보면 ‘부자가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너의 사사로운 지혜를 버리라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잠깐 맡겨두신 거예요.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나누고 베푸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예전에 저도 어려울 때는 짜장면 한 그릇 사먹을 돈도 없었어요. 그러나 요즘은 다르잖아요. 사람들을 초청해서 식탁을 나누면서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조언을 나누고 격려를 해주니 얼마나 유익한지 몰라요. 서로의 삶이 풍성해지는 것이죠.

 

또 하나 여러분, 진정한 저축은 선행이라고 하는 거예요. 시편 37편 25 - 2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종일토록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사람들에게 베풀고 부어준다 그럴 때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 여러분 자식들이 잘 되기를 원한다면 주위에 선행을 많이 베푸세요. 주고 잊어버리세요. 어떤 분들은 준 것만 기억하잖아요, 받은 건 다 잊어버리고. 주거나 받거나 다 잊어버리세요. 물 돌 듯이. 특별히 누가복음 6장 35 - 38절에 보면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주라. 되갚을만한 사람들에게만 나누어준다면 그게 어찌 믿는 사람의 행실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주라’ 38절에서는 아주 강하게 말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에게 주실 것이니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에게 되돌려 주리라’ 이게 하나님 방식이에요. 우리가 기쁨으로 잘 나누면 하나님이 더 많은 것을 맡기셔요. 이곳 인도네시아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신학생들은 보통 1달에 30만 루피아씩만 도와줘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고 해요. 사실 우리한테는 작은 돈이지만 저들한테는 아주 절실하고 필요한 돈이죠.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고, 선행을 베풀며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특별히 선교에 귀하게 사용함으로써 돈의 노예가 되기 쉬운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돈을 다스리며 살아야 하는 거예요. 돈뿐만이 아니죠. 오늘 말씀은 결론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할 때 큰일을 맡겨주신다’.

 

제가 미션중고등학교(기독교학교)를 나왔어요. 제가 중학교에 입학해서 본관 현관에 들어서면 흔히 그렇듯이 교훈이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큰 뜻을 품고 작은 일에 충성하라’ 알고 보니 바로 누가복음 16장 10절 말씀이었어요. ‘충성’할 땐 늘 이 장면이 생각나요.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게 있어요. 논산훈련소에 있을 때 경례 훈련을 하지 않습니까? ‘상관에 대해서 경례’하면 ‘충성’하고 크게 외쳐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국기에 대하여 경례’할 때는 구호 없이 경례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자꾸 틀리더라고요. 얼마나 긴장되고 신경이 쓰이는지 몰라요. 그만 글쎄 다른 사람 신경 쓰다가 정작 ‘국기에 대하여 경례’할 때 너무나 큰 소리로 혼자서 “충성”해가지고 얼마나 얻어터졌는지 지금도 ‘충성’하면 그 일이 생각납니다.

 

여러분, 방지일 목사님이라고 한인선교사 가운데 올해 101세시니까 가장 고령이신데, 1937년 중일전쟁 때 중국 산뚱에 선교사로 들어가서 중국 사람들을 돌보는 거죠. 1957년 중국이 공산화되고도 10년을 버티다가 추방되신 분인데, 그분은 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를 믿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 별명이 ‘방예수’에요. 그가 예수 믿는다고 성씨 촌에서 쫓겨납니다. 다른 마을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 믿다가 쫓겨왔다고 소작을 주려 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시험하느라고 산비탈의 거친 땅을 주면서 여기서 한번 해보라고 했어요. 그 돌밭을 다 일구고 정성껏 가꾸어서 그해 소출을 주인에게 가져다 주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랐어요. “야, 방씨가 믿는 예수 귀신이 특별하긴 특별한 모양이다. 복을 주어서 저렇게 소출이 났구나.” 그 바람에 동네 사람들이 서로 자기 밭을 맡겨 소작을 준거죠.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할 때 큰 결과를 얻었습니다. 또 결국에는 자기 농토를 가질 수 있게 됐어요. 불의한 재물이라고 우습게 생각하기 쉬워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불의한 재물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귀하게 쓸 때 그 손길을 통해서 참된 것으로 돌려주셔요. 그 동네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가문에 많은 목사만 세워지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몇 년 전에 만나뵈었을 때 건강하셔서 “어떻게 이렇게 건강하셔요?”라고 물었어요.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세요?” 그랬더니 “막 살면 됩니다.” 그러셔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충성하며 살라는 뜻이지요. 그저 막 살란 뜻이 아니에요. 오직 하나님 바라보고 살라는 거예요. 그 얼마나 멋있어요. 이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