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20 살아있는 믿음(눅 17:11-19)
성경본문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러분, 오늘 추수감사주일 이 아침에 여러분은 어떤 감사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저는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또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살아가는 시절 서울의 한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요. 시작한 지 몇 년이 안 된 교회에 집사로 임명 받아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입니다. 주일 오후에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7시가 다 된 거예요. 집에서 교회까지가 300미터가 안 되는 걸로 기억을 하는데 얼마나 놀랬는지 세수도 못하고 그냥 막 뛰어갔습니다. 정신 없이 들어서서 맨뒷자리에 앉아 머리를 숙였습니다. 기도라기 보다는 숨이 차가지고 숨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목사님이 제 어깨를 툭 만지시면서 “장집사 오늘 기도해요.” 그날 저녁예배 기도자가 빠진 모양이에요. 정신 가다듬을 겨를도 없는데 기도하라고 하니까 “네” 하고는 일어나서 목사님을 따라갔습니다. 갑자기 기도 부탁을 받았으니 뭘 어떻게 기도를 해야 될까? 머리가 복잡합니다. 찬송 한 장 부르고 기도하는 순서에 이렇게 저렇게 많이 기도하고 오늘 설교하실 우리 목사님에게 성령 충만케 하소서 기도하고 제 자리에 가서 앉았는데 그 순간 깜짝 놀랐어요. 그날은 우리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게 아니고 강사 목사님이 계셨던 거예요. 제 뒤를 따라서 올라오셨던 거예요. 제가 그날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기억에 없어요. 너무 얼굴이 뜨겁고 죄송하고 부끄럽고 교회를 대표해서 기도했는데 이게 뭐냐! 제가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불러서 훈련을 시키셔서 목사를 삼으시고 이렇게 교회를 섬기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이게 저의 감사에요.
오늘 여기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나환자들을 고치시는 사건이 있어요. 한 순간에 열 명이나 고치셨어요. 그런데 고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주님 앞에 나와서 ‘감사합니다’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어요. 예수님이 묻지요. ‘나머지 아홉은 어디 갔느냐?’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셔요. 누가복음을 꼼꼼히 읽어보면 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걸음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마지막 길이에요. 굉장히 의미심장한 걸음이에요. 무거운 걸음이에요. 그런데 갈릴리에서 출발해서 사마리아를 거쳐서 요단강 줄기를 따라 걸어내려 오다가 여리고에서 길을 꺾어 언덕길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그게 사흘길이에요. 걸어서 사흘길이에요. 사실은 갈릴리에서 출발해서 사마리아 한복판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이 훨씬 빠른 길이에요. 그런데 일부러 요단강 쪽으로 돌아서 다녀요. 왜? 사마리아 사람들은 원래 뿌리는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었지만 역사 속에 앗수르에 망하면서 앗수르의 이주정책에 의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 땅에 들어와 살면서 사마리아 사람들과 혼혈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같이 취급을 했어요. 사마리아 사람하고는 상종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으려고 돌아다녔어요. 주로 북쪽의 갈릴리부터 요단강 줄기를 따라 내려 오다가 여리고에서 꺾어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길을 택했던 것이지요.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지역을 지나가실 때에 한 마을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나환자 마을이었어요. 우리도 그러잖아요. 쓰레기 매립장을 도시 한복판에 만드는 데가 어디 있겠어요. 변두리에 만들겠지요. 나환자들은 평범한 일상 속에 들어올 수 없잖아요. 아마도 갈릴리 중심에서도 쫓겨나고 사마리아 중심에서도 쫓겨나는 변두리가 겹치는 경계지역에 그들끼리만 모여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마을을 지나가시다가 오늘은 그 마을에 들어가셨어요. 그 마을로 접근하셨어요. 아마 예수님도 여러 번 예루살렘을 왕복하셨으니까 그 마을을 주목해 보셨을 거예요. 그러나 오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걸음이에요. 늘 바쁜 걸음으로 가셨던 주님이 ‘다음에 들르지’ 하고 지나쳤던 마을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오늘은 지나칠 수 없어요. 그 마을에 들어가셨어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본 나환자들이 깜짝 놀라가지고 멀리서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더 이상 오지 마십시오.” 유대 율법에 의하면 나환자들은 전염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이 오기 전에 자기가 나환자라고 하는 것을 반드시 알려야 해요. 알리지 않아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그 책임은 나환자에게 있어요. 그럴 경우엔 돌에 맞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애타게 말합니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도 율법을 지키시는 분이니까 그곳에 멈춰 서서 소리쳐 외칩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 나환자가 고침 받아 몸이 깨끗해지면 그걸 누가 판정해야 되느냐? 제사장이 판단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장에게 자기 몸을 보여요. 제사장이 조사를 해보고 깨끗하다고 선언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 ‘가서 대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 그 말은 고쳐졌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로 간 거예요. 성경을 보니까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했어요.
여러분, 말씀이 먼저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할 때 그걸 여러 가지로 해석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존재하는 생명체 가운데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에요. 말의 권세를 가졌어요.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 빛이 있었어요. 우리들에게도 말을 주셨어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말이 바뀌는 사람이에요. 감사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아직도 불평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얘기해야 되겠지요. 언어가 바뀌는 거예요. 환경이 좋아지는 걸 보고 기뻐해서 말이 바뀐 게 아니고 말을 믿음으로 선포할 때 환경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사랑 받을 만한 존재이기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사랑한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한다’고 말할 때 상대가 사랑스런 존재로 바뀌는 거예요.
예수님이 ‘제사장들에게 가서 보여라’ 하셨기에 그 말씀을 듣고 갈 때 나음을 입었다. 그들이 가다가 깜짝 놀랐어요. 자기 몸이 나은 것을 보고 너무 놀랐어요. 그 중 한 사람이 감격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발 아래 엎드려서 “감사합니다. 나를 고쳐주시니 감사합니다.”한 것이지요. 그러면 다른 아홉 사람은 분명히 같이 고침 받았을 텐데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이 이방인 외에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고 말하는 것을 봐서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 즉 유대 사람들이에요. 유대사람들은 율법에 매여 살았던 사람이니까 율법의 규정대로 몸이 나았지만 제사장에게 보여서 합격 판정을 받아야 진정 나은 것으로 확인이 되는 것이지요. 규칙대로 제사장에게 먼저 가서 자신의 몸을 보이려고 했던 거죠.
율법은 우리 신앙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지요. 바르게 살아야 되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앞설 수는 없어요. 율법은 은혜를 계속 보존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너무 율법적인 사람, 너무 규범에 충실한 사람은 자칫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려요. 오늘 유대인들도 율법의 규정을 따라가다 보니까 그만 예수님을 잊어버렸어요. 율법을 제대로 모르고 살았던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은 고침 받는 순간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감사했다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에 사마리아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 왔고 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자가 너 하나밖에 없느냐’ 라고 말씀하셨어요. 두 번이나 말씀하신 것은 오늘 본문의 초점이 어디 있는가를 말해요. 감사가 늘 차고 넘칠 수 있는 출발점은 어디냐?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지요. 생명도 은혜요, 건강도 은혜요, 깨닫고 보면 병든 것도 은혜예요. 그런 말 아세요? ‘병들면 마귀도 천사가 된다.’ 병들면 마귀도 꼼짝 못하잖아요. 악한 짓 나쁜 짓 하고 싶었는데 꼼짝 못 하잖아요. 병드는 것도 은혜에요. 나로 하여금 높아졌던 마음을 낮추시고 복잡한 인생 계획을 다 깨뜨리시고 하나님을 주목하게 하시는 거예요. 병들면 하나님께 나와서 은혜를 구하잖아요. 안타깝게도 병에서 고침을 받으면 사람이 얼마나 둔한지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 받은걸 싹 잊어먹어요. 다시 옛날로 돌아가요. 그래서 병들어 ‘주님!’하고 간절히 부르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경험할 때가 인생의 하이라이트에요. 거기서 끝맺는 것도 은혜에요. 하나님이 쓰실 사람은 고쳐주시지만 이때가 그 인생의 가장 좋은 때라고 판단하시면 그냥 불러가시는 거예요. 그거 은총이에요. 멀쩡하게 딴짓하는 것보다 나은 거예요.
오늘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건 주님의 이적을 체험하고 몸이 건강히 회복되었습니다만 아직 온전한 구원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것이 구원이지요.
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우리가 밤낮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믿음을 배우는데 도대체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십시오. 이게 제자들만의 고민이겠어요? 우리들의 고민이기도 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가 막힌 말씀을 하셨어요. ‘만약 너희 안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겨자씨는 굉장히 작아요. 저도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갔을 때 겨자씨를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가이드 하는 분에게 그거 좀 보자고 했더니 가르쳐주더라고요. 겨자씨가 작아가지고 주머니에 넣었는데 올 때쯤 열어보니까 어디 갔는지 없어져 버렸어요. 하도 가볍고 작아가지고 말이에요. 여기서 ‘만약’ 이란 가정법을 쓰셨는데 이 가정법의 의미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가정이에요. ‘너희 안에 비록 작지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지 않느냐, 살아 있는 믿음이 있지 않느냐?’ 오늘 예배하러 온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거예요. 얼마든지 딴 길로 갈 수 있었어요. 비록 졸더라도 여기 와 앉아있는 것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을 들어보세요. ‘만약 너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다면, 비록 작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다면’ 그건 살아있는 믿음 이에요. 그렇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예수님도 중국사람 못지않은 과장법을 쓰세요. ‘태산아 바다에 빠져라’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중국식의 과장법이에요. ‘산아 바다에 옮겨져라’ 백날 얘기해봐야 산도 움직이지 않고 바다도 변하지 않아요. 우리 큰 딸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다리를 건너다가 이 말씀이 생각이 났대요. ‘태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어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저 멀리 보이는 태능의 불암산을 보면서 중랑천으로 빠지라고 명령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예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명령을 했는데 또 안 빠졌어요. 혼란에 빠졌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세월이 한 15년 흘러가지고 나중에 저한테 고백을 하더라고요. “아이고. 그 표현은 예수님의 강조형이고 하나의 과장법이다.” 겨자씨 같이 작지만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너의 삶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이적으로 함께 하실 것이다 하는 말씀이죠.
제가 며칠 전에 어떤 분을 만났는데요. 이제 나이 마흔쯤 되신 것 같은데 예전에 이랜드 신입사원으로 입사를 했어요. 예전의 이랜드는 신앙단체 같은 기업이었잖아요. 신입사원수련회가 완전히 신앙수련회였어요. 이분이 거기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때부터 예수님이 자기 앞에 나타나시는 거예요. 자기와 동행 하시는 거예요. 이분은 예수님을 처음 믿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보는 줄 알았던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와 사흘을 동행하시는데 자다가 눈을 떠도 예수님이 자기를 쳐다보고 계시더래요. “화장실 있을 때는 어떡합니까?” 그랬더니 문 앞에서 기다리시더래요. 얼마나 놀라운 체험인지 몰랐기 때문에 나중에는 귀찮더래요. 자꾸 쫓아다니니까 신경쓰이더래요. 또 나타나시길래 “예수님은 바쁘시지도 않으세요?” 그랬대요. 드디어 사흘 만에 “예수님 이제 됐어요. 충분해요.”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드디어 보이지 않고 사라지셨다는 거예요. 아마도 그 사람이 처음 믿는 것을 너무 기뻐하셨던지 그 믿음이 확실해 지도록 예수님이 자기를 드러내기까지 사랑하셨던 거지요. 만약에 우리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는 어떡할까요? 아름답게만 보이려고 했겠죠. 그래서 그분이 지금 모습을 감추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시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요? 구약을 읽어보세요. 죄지은 사람을 그 자리에서 심판하시면 어떻게 됐겠어요. 다 죽지 않았겠어요?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헌금으로 바치고도 성령을 속인 죄로 엎드러져 목숨을 잃었는데 우리도 엎드러져 죽지 않겠어요? 그게 자유일까요? 아니요. 우리를 위해서 그분이 모습을 감추신 거예요.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지만 주님을 바라보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 주님이 일하셔요. 시편 50편 23절에 말합니다.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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