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10422 고독한 십자가 (막 15:29~41)[하늘이 한 번 찢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다시 닫힐 수없음]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0. 18. 13:42

110422 고독한 십자가 ( 15:29~41)     

성경본문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제 육 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중에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모처럼 계획을 세우고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지순례의 꽃은 예루살렘이라 할 수 있죠.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보면 종종 실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실망하게 되는 대표적인 장소가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이라 할 것입니다. 2000년 전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거든요.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셨다는 자리에서부터 출발해서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갑니다만 지금은 시장이 되어 있어요. 이슬람 아랍 사람들의 시장 한복판을 뚫고 올라갑니다. 도무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길은 오히려 오늘 말씀 속에 정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열고 200년 전 유대 땅으로 같이 돌아가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이 길을 같이 올라가 봅시다. 골고다 언덕의 풍경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선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가장 극악한 죄수에게 처하는 형벌이었기에 십자가에 가까이 가는 사람일수록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 거친 사람들이요, 착하게 살았다는 사람들은 아마도 멀리 서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 바로 아래는 예수님을 못 박는 군병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날 아침 이른 시간에 예수님을 끌어내어서 그의 옷을 벗기고 붉은 천 조각을 뒤집어씌우며 그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며 갈대로 머리를 때리며 침을 뱉고 가시 면류관을 씌워서 피 흘리게 하고 희롱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끌고 올라갑니다. 십자가는 기둥이 있고 가로대가 있습니다. 기둥은 저 언덕 위에 준비해놓은 것이고 죄수는 자기가 매어 달릴 가로대를 메고 올라가는 것이죠. 흔히 보는 영화와는 다른 것이죠. 그러나 그것마저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십니다. 드디어 골고다 언덕에 올라오자마자 지체할 것도 없이 명령에 따라서 아침 9시에 못 박힙니다.

십자가 형벌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행할 수 없는 형벌이었습니다. 너무나 잔인하고 고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반역자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죽는 것을 보여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한 형벌이었죠. 흔히 손에 못을 박는다고 얘기하지만 발굴된 십자가에 근거해서 고증해보면 손바닥에 못을 박아서는 몸이 쭉 하고 찢어져 내리는 거죠. 보통은 팔뚝에 못을 박되 나무판을 대고 박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몸이 쳐지는 것을 팔이 견디지 못해서 찢어져도 손목에 걸리도록 한 것이죠.

또 옷을 다 벗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옷이 다 벗겨졌습니다. 그 옷을 나누느라고 제비를 뽑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거친 일을 하는 군병들이었기에 십자가에 달린 자가 누구인지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때리고 조롱하고 시키는 대로 못을 박을 뿐이죠.

한 발 떨어진 곳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그 강도들을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를 욕하면서 죽은 사람으로 나옵니다. 어쩌면 네가 메시야라면 너 자신도 구원하고 나도 좀 구원해다오아마 그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떨어져 보면 예수를 고소해서 죽음으로 몰아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되나 보자 하고 쳐다보고 지나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경꾼들이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어요.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에요.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을 사흘 만에 짓는다고 하는 자여, 어디 너 자신을 구원하라.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우리로 하여금 너를 믿게 하라.” 조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합니다만 저가 누구인가는 관심이 없어요. 놀랍게도 골고다 십자가 언덕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가진 자가 없었단 말이에요.

이제 좀 멀리 떨어져서 여자들이 서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요.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의 이모였던 살로메,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섬겼던 여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하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합니다만 마치 그것은 여인들이 특별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그런 반응을 넘어서지 못해요. 마가복음은 냉정하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를 감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로서 지금 죽고 계심을 제대로 눈 뜨고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마가복음의 증언이에요.

원래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했는데 특별히 마가는 교회 역사 속에 베드로를 따른 사람이에요. 베드로전서에 보면 마가를 내 사랑하는 아들 마가라고 얘기했어요.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별명은 베드로복음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고 한평생 주님을 좇았던 베드로를 통해서 행해졌던 수많은 설교, 베드로의 입에서 나왔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바탕으로 마가복음이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마가복음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올바로 발견하고 고백했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늘 그는 주저하는 자요, 부인하는 자요, 심지어는 그를 모욕하고 저주한 자였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설교 중에 주님을 높이느라고 자기를 낮추면서 설교한 바탕이 깔려 있기도 하지만 마가복음에는 주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16장까지 단 한 번도 베드로가 주님을 올바로 고백하지 못해요. 우리가 아는 마가복음 8장에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할 때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만 신앙고백의 이면에 숨어있는 흐름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들이 그러했듯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지만 온전히 고백하지 못하고 들은 대로 느낀 대로 순간적인 감동으로 고백한 거죠. 삶을 온전히 고백에 담아놓지는 못했죠. 베드로는 그런 것을 고백하고 있어요.

오늘 여인들도 저들이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주님을 섬긴 아름다운 여인들이었지만 그들의 눈물은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요, 우리의 삶을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육신의 아들로서, 내 조카로서,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정으로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오늘 골고다 십자가 풍경 속에 제자들은 보이지 않아요. 아예 기록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도망간 자들이에요. 그들은 그 전날 밤만하더라도 베드로를 위시해서 모두 다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그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고백했던 자들이에요.

우리가 예수 믿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은혜를 받고 주님께 헌신을 고백하기도 하죠. 여러분, 오늘 그 고백 다 어디에 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이 골고다 십자가 어디쯤 서 있습니까? 아무리 들여다봐도 오늘 십자가는 너무 외로운 십자가예요. 너무 고독한 십자가예요. 한줄기 눈물을 흘리지만 주님의 의미를 깊이 알지 못하고 자기 감흥에 흘리는 눈물이에요. 여러분, 이게 십자가 풍경이에요.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오후 3시까지 고통스런 6시간이요. 12시부터는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습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십자가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둠과 비바람을 피해서 물러가버렸어요. 어둠 속에 매달려 있는 고통의 3시간이죠. 드디어 마지막으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주님이 외쳐요. 이 외침이 그저 감동적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죠. 이건 그야말로 완전히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죽어가는 죄인으로서의 부르짖음이에요. 이 구절은 시편 22 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시편 22편을 읽어보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 고통 당하는 사람의 안타까운 고백이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이 겪는 가장 무서운 공포이죠.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많은 것을 겪을 수 있습니다만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했을 때의 공포, 그 두려움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가서 주님의 외침을 듣고 주님의 고통을 주목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죽은 것은 바로 너 때문이다. 여러분, 그분이 왜 십자가에 죽어야 했습니까? 그것도 왜 나를 위해서 그렇게 죽어야 했다고 말합니까? 이사야 53 4절에서 6절 말씀을 보니 그가 채찍에 맞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이제 나음을 얻었다. 우리가 양 같이 길을 헤매고 있을 때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아주 외로운 십자가예요. 아무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십자가예요. 그런데 오늘 놀라운 이적이 일어나요. 단 한 사람, 그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을 발견하는 사람이 나와요. 그것도 십자가 바로 아래에서.

오늘 성경을 보니까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관찰하다가 ,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이렇게 고백해요. 너무나 놀랍게도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여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마지막 순간에 백부장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와요. 가장 거칠고 험하고,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십자가 아래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이죠. 백부장은 로마 사람이요, 이방인이에요. 그는 예수님의 사형집행을 책임진 사람이에요. 부하들을 이끌고 아침부터 명령대로 예수를 채찍으로 때리고 끌고 올라가는 것이죠. 그러나 현장의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주목해 보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가 숨이 넘어가는지도 주목해 보고 있다가 빌라도 총독에게 보고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순간을 놓치지 아니하고 십자가를 주목하고 있었던 사람이죠.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글이 있습니다. 물론 그 글의 위서 僞書 논쟁도 있습니다만 참고할 대목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빌라도의 부관으로 말커스라는 사람이 나와요. 빌라도가 로마 총독으로 유대를 다스리는데 예수라는 인물을 무심하게 내버려뒀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죠. 말커스를 시켜서 그 일에 대한 전말을 늘 보고 받는 거죠. 예수의 동향에 대해서 보고 받는 것이죠. 당연히 정보기관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이죠. 말커스는 유다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들을 꿰뚫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갈등관계도 알고 있습니다. 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또 바리새인과 헤롯당들의 관계도 알고 있어요. 로마지배를 지지하고 있는 자들은 물론 로마에 반대하며 게릴라전을 펼치려고 하는 열심당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어요. 복잡한 상황 속에 등장한 예수에 대해서 정치적 색깔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분석합니다. 알 수 없어요. 예수는 바리새인과 손잡은 것도 아니요, 사두개인과 손잡은 것도 아니요, 열심당과 손잡은 것도 아니에요. 어느 당파에 속하지도 않았어요.

그를 주목해서 그가 한 말을 낱낱이 들어봅니다. 분석해봅니다. 종종 그가 일으켰다는 이적을 보고 받습니다. 탐문조사를 해요. 거기서 나온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왔다는 거예요. 이적을 선포하면서 메시야임을 증거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놀랍게도 그 메시야가 다윗과 같은 왕이 아니라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이죠.

유월절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절기를 지키는 관계로 로마군대가 가장 경계하는, 시한폭탄과 같은 위험한 절기인데 그때 예수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논쟁하며 자기의 죽음을 예고합니다. 말커스가 판단할 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스스로 자초한 죽음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을 의도적으로 자기를 죽음에 몰아넣어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린 것이죠.

말커스에게 의문이 있었어요. 저는 과연 누구인가? 과연 메시야인가, 그리스도인가? 오늘 말커스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세요. 예수님이 죽으시는 모습을 주목하고 지켜보다가 , 이는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여러분, 사순절 복음서 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오늘만큼은 한끼 금식도 좋고 미디어 금식 아시죠? 오늘 같은 말은 TV도 끄고 성경을 읽어보세요. 마가복음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진실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로마인이요 이방인의 입에서 나오는 이 고백이 마가복음의 클라이막스예요.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메시야를 기다리고 왕을 기다렸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로마인 이방인의 증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요.

예수께서 죽으실 때 로마 백부장이 , 진실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선포하는 순간, 예루살렘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집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져요.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에요. 거기는 1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모든 백성을 대신해서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들어가요. 거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에 대제사장만 1년에 단 한 번 들어갈 수 있었던 곳이에요. 그 제사장도 혹시라도 그 안에서 죽게 되면 누구도 들어가서 끄집어낼 수 없기에 제사장의 허리를 긴 끈으로 묶고 들어갑니다. 혹시라도 거기서 죽는다면 허리 줄을 잡아당겨서 끌어내야 할 만큼 그렇게 거룩한 장소였어요.

그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는 휘장이 찢어져요. 무슨 말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찢어진다는 표현은 뜯어졌기 때문에 다시 엮을 수 없다는 뜻이에요. 마가복음에 찢어진다스키조마이라는 헬라어가 딱 두 번 쓰여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라고 했어요. 하늘이 열린다고 하면 보통 문이 열린다는 의미예요. 문은 열렸다가 제 모습으로 닫혀요. 그러나 열린다고 쓰지 아니하고 스키조마이, 찢어졌다. 하늘이 한 번 찢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다시 닫힐 수 없어요. 다시 꿰맬 수 없어요. 그 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역을 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었어요. 하늘이 찢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임한 거예요.

백부장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고백하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열려요. 더 이상 성전의 제사는 필요하지 않게 됐어요.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내어놓고 피를 흘리고 쏟으셨으므로. 그러므로 신약적인 의미로 말하면 더 이상 제단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강단이라고 말해요. 더 이상 우리의 예배를 제사라고 말하지 않아요. 때로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제사가 완성됐어요. 이제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그 십자가를 외롭고 고독한 십자가로 골고다 언덕에 그냥 세워놓으시겠습니까? 로마 백부장이 그리스도를 발견했던 것 같이,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주목하고 예수의 고통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지켜봅시다. 그의 말씀과 행적과 모든 것을 면밀히 살피는 자에게 하늘나라를 찢어 보이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새롭게 바라봅시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