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영혼의 보금자리[오늘은학교에서뭘물어봤니,시=무지개,순종]/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07:20

080720 영혼의 보금자리          설교집Ⅴ<영혼의 보금자리> No. 7

성경본문(개역개정)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84:1-4)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 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1944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분입니다. 그가 발견한 원자 시계는 오늘날 카 네비게이션에 활용된다고 합니다. 그의 그 탁월한 업적에 대해서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위대한 학자가 된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우리 어머니 때문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꼭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오늘은 학교에서 뭘 물어봤니?’ 그렇게 꼭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비결입니다.” ‘뭘 물어봤니?’ 뭐 좀 다르지 않습니까?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다섯 살 짜리 어린아이와 45세 중년을 비교한 결과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는 하루에 아흔여덟 번 뭔가 새로운 일을 하려고 시도를 하고 백열세 번 웃고 예순다섯 번 묻는답니다. 그러나 45세가 되면 뭔가 새로운 일은 하루에 두 번 시도하고 열한 번 웃고 여섯 번 묻는 답니다. 이게 늙는 거예요. 하나는 생동감이 넘치고 하나는 시들어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교육의 비극은 학교에서 학년이 높아 갈수록 더 이상 묻지 못합니다. 분위기가 그래요. 어른이 되면 아예 그러려니 합니다. 눈치로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오늘까지 이러고 살아 온 거지요.

여러분, ‘윌리암 워즈워드’ 라고 하는 영국의 시인이 있잖습니까. ‘무지개’라고 하는 시를 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기억이 납니다. 한번 찾아 봤어요.

 

하늘의 무지개 바라보면 내 가슴 뛰나니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러할찌어다.

아니면 이제라도 나의 목숨 거둬 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하노니 내 생애 하루하루가

천생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질찐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궁금증을 가지고 의문을 가지고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에요. 그럴 때 우리의 이성이 꽃 피게 되죠. 이성은 건강한 신앙의 매우 중요한 기초예요. 사실 이단의 위협을 이야기합니다만 기존 교인들이 너무 몰라요. 그들은 차라리 잘못된 것이라도 막 파고들어 묻고 듣는다고 하면, 우리는 너무 몰라요. 그러나 이렇게 묻기 위해서는 새롭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주간에 잠깐 한국에 다녀 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케이블 TV를 틀다보니까 채널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죠, 최소한 60개 내지는 심지어 100개 가까이나 되는 채널들이 나와 있거든요. 종교채널도 다 있잖아요. 기독교, 천주교, 불교 다 있는데 기독교 채널을 틀어보니 아침 설교가 목소리가 너무 크더라고요. 그래서 넘기고 넘기다 보니까 불교 채널이 나오더라고요. 근데 마침 조용히 절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이나 하나 또는 뭐라고 하나 보자 하니까 백팔 번 하더라고요. , 아마 백팔번뇌를 씻는 절인 모양이구나.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번 한 번 할 때마다 다 의미가 있어요. ‘잘못 되고 악한 자를 사랑하지 못했던 내 죄를 참회하며 절합니다. 이 모든 자연 만물이 나와 다 인연이 있음을 깨닫고 절합니다. 내가 부처를 의지하기를 기원하며 절합니다.’ 드디어는 백팔 번 절하고 끝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정말로 우리가 원하고 해야 할 말은 그 안에 다 담았어요. 근데 딱 하나 빠진 게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만은 없어요. 그게 다 내 마음을 비우고 나의 정성을 다해서 그러한 일을 이루겠노라고 하는 거예요. 뜻은 아름다운데 과연 그러한 일을 우리의 지혜, 우리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이에요. 한국의 지하철에서 이런 문구를 봤어요. 광고 문구인데, 20대의 사랑보다 절실하고 30대의 성공보다 보람 있고 40대의 돈보다 값지고 50대의 명예보다 빛나고 60대의 건강보다 귀중하고 70대의 휴식보다 편안한 것, 이 모두를 합친 것 이상을 단학이 드립니다.’ 단학선원의 광고였어요. 지금은 ‘단월드’로 이름을 고쳤어요. 많은 분들이 이런데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이것을 시작한 ‘이승헌’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뇌호흡> 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인간의 모든 문제는 뇌에 에너지흐름이 막혀있기 때문이다. 뇌호흡을 통해서 그 뇌의 에너지 회로를 복구할 때에 참된 자기를 만날 수 있다.’ 이게 그의 지론입니다. 그가 21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아니하고 극심한 상태에서 뭔가를 체험하고 발견했다, 이건 하나의 종교지요. 자기가 깨달았던 그것을 현대인들에게 이야기 하려고 하는데 현대인들은 그런 부분에는 관심이 없기에 현대인에게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건강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새로운 포스트 모더니즘 종교를 하는 거예요. 이건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니라 단학선원을 통해서 건강인 줄 알고 모인 그들에게 건강을 통해서 새로운 종교를 퍼뜨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알고 하셔야 돼요. 결국 물어 봐야 되는 것이지요. 뭘 말하는지 주의 깊게 들어보고 생각해 봐야 되는 것이지요.

욥기 127절로9절 말씀에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도 깊이 생각하면서, 물어보면서, 들으면서 신앙생활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제일 많이 쓰는 말이 아마 순종일 것입니다. 헬라어로 ‘휘파쿠오’ 그래요.  휘포아쿠오라는 말이 묶인 거예요. 아쿠오라는 말은 듣는다는 말이고 휘포라는 말은 아래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마음을 낮추고 아래 자리에서 그 말씀을 집중해서 듣는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진지하게 들으면 알게 되잖아요. 하나님의 그 말씀을 그렇게 들을 때에 우리 안에 깨달음이 있고 발견이 있고 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예배자세가 흐트러지면 다른 건 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건강한 신앙의 기초는 묻는 데 있습니다. 온전히 묻기 위해서 또 잘 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들음에서 믿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그 말씀을 잘 들을 때에 그 말씀 속에서 내 마음을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젊음의 탄생>이라는 ‘이어령’교수의 최신간 책이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이 한국에 자주 드나드시는데 책 선물을 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너무 감사해요. 다른 거 하지 마세요. 꿀도 좋고 넥타이도 좋고 하지만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책을 사다 주세요. 그걸 부러 사러 어딜 돌아다니지 마세요. 공항 서점에 들러서 눈에 들어오는 거, 여러분 맘에 드는 거, 아무 거라도 가져 오시면 제가 먼저 보고 우리 교회 도서실에 내 놓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 선물 받은 것이 <젊음의 탄생>이었습니다. ‘이어령’ 교수가 지난 서울대하교 입학식에서 했던 강의가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어요. 그래서 내친김에 책을 한 권 냈습니다. 거기에 제비 이야기가 있어요. 그분이 어렸을 때 초등학교를 다닐 때 제비에 관한 공부를 하는데 여러분도 기억나실 거고 저도 기억이 나요. 교실 뒤 게시판에다가 얼마나 빨리 달리나요 해가지고 사자는 시속 몇 킬로, 타조는 몇 킬로 하는데 제일 빠른 게 제비잖아요. 그런 공부시간이 있었는데 제비가 빨리 날아가는 거 누가 모르겠어요. 훤히 알지. 그거보다 더 궁금한 건 그 많은 새들 중에 왜 유독 제비는 사람 사는 집에 둥지를 트는가. 어떻게 집안에 둥지를 트는가. 또 하나는 어미가 먹이를 물어 올 때마다 새끼들이 입을 쫙 벌려 가지고 얼굴도 안 보이게 입만 벌리고 있는데 어떻게 어미가 어떤 놈이 먹고 안 먹었는지 그때마다 알고 먹이를 주는가. 그걸 물어 봤대요. 그랬더니 선생님께 쓸데 없는 질문하고 있다고 한 대 맞았다는 거예요. 가르치는 거나 제대로 듣지.

그래서 그분은 참 모진 수난과 핍박 속에서 공부했다는 거예요. , 끝없는 호기심, 결국은 자기가 다 뒤져서 찾아 낸 거예요. 제비어미는 먹이를 물어 와서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는데 또 물고 오면 이 놈들이 모두 입을 벌리거든요. 그런데 제비들은 구조적으로 먹이를 먹으면 입을 다 벌릴 수가 없답니다. 짹짹거리기는 하는데 어미는 어떤 놈이 먹고 안 먹었는지를 구별해 낼 수 있대요. 입 벌린 모양을 보면 알 수 있대요. 그래서 안 먹은 놈만 주는 거예요.

근데 그것도 옛날 얘기래요. 왜 그러느냐. 지금은 환경이 오염돼가지고 어미제비가 먹이를 물어 오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진 거예요. 갔다 와보니까 먹은 놈이 소화가 다   돼 가지고 입을 벌리는데 이제는 구별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비의 개체수가 줄고 있대요. 환경이 오염되는 바람에 어떤 놈에게 먹이를 줘야 되는지 혼동이 오는 거예요. 또 하나는 집에다 둥지를 트는 유일한 새라는 거지요. 거기에서 제비의 믿음을 본다는 거예요.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옴으로써 오히려 사람에게 사랑 받지요. 사람들이 잡아먹지 않잖아요. 중국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잡아먹지 않아요. 또 하나는 인간 품에 안겨 있으므로 다른 천적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가장 센 사람 밑에 자기를 맡김으로써 다른 모든 적으로부터 보호 받는다. 제비의 지혜요 믿음이다, 이렇게 재미있게 설명했어요.

예레미야 8 7절에

 

제비는 돌아 올 때를 정확히 아는데

내 백성은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도다.”

 

영어로 제비를 swallow 그러잖아요. 그런데 이 swallow는 명사로는 ‘제비’이면서 동사로는 ‘삼키다’라는 말이에요. 삼키다. 너무 굶주려 가지고 막 삼키는 거예요. 또 하나의 의미는 어떤 거냐 하면 너무나 영적인 갈망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을 얼른 붙들어서 믿는 것. 갈증과 열망이 있는 믿음상태를 또한 swallow라고 그래요. 이게 우리의 영성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이지요. 그럼 어떻게 이것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섬기고 일하던 고라자손들의 노래예요. 이 고라자손들은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대대로 성전 안의 모든 일을 보살피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솔로몬의 화려한 성전에서 그 건물규모에 압도당하고 자만에 빠졌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성전의 본질을 잃어버리니까 성전마저도 무너뜨리시고 그들을 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어요.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단 하나 남았어요. 갈망이 남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일어나게 하시고 페르시아의 새로운 화합정책으로 말미암아 포로된 유대인들이 해방을 얻게 됐어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고향에 돌아와서 자기들의 힘으로 성전을 새롭게 지었어요. 예전의 솔로몬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초라한 성전이지만 이제는 성전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잃었던 자유를 되찾고 잃었던 예배의 감격을 되찾은 거예요. 그러면서 찬송하는 거예요. 여기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표현대로 암사슴이 목말라 시냇물을 찾는 것 같이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비록 작은 성전이지만 뜨거운 마음으로 성전을 섬기는 고자자손들의 노래예요.

여러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그런 전쟁과 재난, 이건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거지요.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있을는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또 안다 한들 막아낼 길이 없어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평안한 하루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총이에요. 우리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깊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존재를 넘어서서 온 우주 만물을 섭리 속에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서 경배해야 돼요. 이성의 한계를 인정해야 돼요.

아인슈타인에게 누군가 물었어요. “선생님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랬더니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말했어요. “내게 있어서 죽음이란 더 이상 그 아름다운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요.” 과학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어요. 죽음 현상을 과학적으로 얘기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과학적으로 해부하고 해석한다고 해서 그게 우리에게 만족을 주나요? 아인슈타인은 예술로 대답한 것뿐이에요. 누군가 그랬어요. 과학이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고, 예술이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고, 종교란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랬어요.

신앙이란 신비해요. 우리가 묻습니다.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의 생명가운데 펼치시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자세를 낮추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마치 우리는 홍해 앞에선 이스라엘백성과 같아요. 도저히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건너갈 길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도자 모세에게 주신 말씀과 같이 너희는 오늘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너희를 위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노라.’ 끝까지 물어봐야 하지요.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에 나는 죽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베푸시는 놀라운 은총을 받아 들이는 거지요.

자 그것을 배우는 게 교회예요. 그 은총가운데 사는 게 교회 생활이에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교회가 흔들리면 우리 삶은 다 파탄나는 거예요. 교회가 시끄러운데 여러분 행복합니까? 정확한 수치를 몰라서 그렇지 교회가 시끄러울 때는 부부싸움이 잦아요. 교회가 평안하면 싸울 것도 그냥 참고 넘어가게 돼요.

<거위에게서 배우는 지혜>라는 재미있는 글이 있어요. 거위가 날아갈 때 V 자 대형을 이루고 무리가 함께 날아갑니다. 앞에선 거위의 날개짓이 공기를 부양해요. 떠올리게 해서 뒤에 따라가는 거위가 쉽게 날도록 해줘요. 힘을 제공해줘요. 그래서 혼자 날 때보다 V 자 대형으로 함께 날아갈 때 73% 더 멀리 갈 수 있대요. V자 대형에서 한 놈이 이탈하게 되면 당장 공기의 저항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대요. 또 하나 앞에 가는 거위는 바람을 많이 맞으니까 힘들겠지요. 지치면 맨 뒤에 있는 놈하고 맞교대를 한대요. 그렇게 하면서 날아가요. 서로를 이끌어 주면서 날아간대요. 또 꽥꽥거리면서 잘한다고 응원하면서 날아간대요. 그러다가 다친 거위가 있거나 곧 죽게 된 거위가 있으면 다른 건강한 두 거위가 안내해 가지고 대열에서 떨어져 나와서 그가 죽기까지 지켜주고 그가 죽은 다음에야 이 거위들은 따라온대요. 사람보다 백 번 나은 것 같아요.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안에서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길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이 있는 거예요. 오늘 고라자손들이 예배를 잃고 자유를 잃고 신앙의 자유를 잃었다가 되찾고 나서 노래합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는 행복하도다. 주님께 힘을 얻는 사람은 행복하도다. 날마다 시온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는 행복하도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지라도 그 곳은 새로운 은혜의 샘이 될 것이다. 날마다 나아갈수록 힘을 얻는 자는 행복하도다.’ 여러분, 우리 영혼의 보금자리가 어디입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 여기에서 생수를 얻고 생명을 얻고 진정한 삶의 행복을 얻는 사람. 예나 지금이나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기도

하나님 생각해보면 일주일에 한번 지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입을 다물고 주님을 주목하며 주님께 예배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영광을 보이시고 말씀하시고 또 새로운 한 주간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지혜와 용기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영혼의 보금자리 교회의 비밀을 우리가 은총으로 받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