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처음부터 들은 것[핵심은예수그리스도의십자가와부활 말씀순종]/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07:43

080629 처음부터 들은 것

성경본문(개역개정)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생명이니라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한일서 2:22-27)

 

<러브 스토리>로 유명한 ‘에릭 시걸’의 또 다른 소설 <드보라>는 정통 유대인 랍비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드보라’라고 하는 소녀가 자라면서 자기 신앙에 대해서 물음을 던집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았을 때 유대 율법은 그녀를‘부정하다’고 합니다. 남자아이를 낳으면 40일을 기다려야 정결해지고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런데 여자아이를 낳으면 80일을 기다려야 된다. 왜 남자는 40일이면 되는데 여자는 80일을 기다려야 되나요.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단다. 또 기도를 하려면 최소한 10명이 모여야 하는데 이게 기도정족수인데 여자는 수에 헤아리지 않아요. 그러나 아기라도 남자라면 헤아려서 10명 기도회를 할 수 있어요.

   정통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중심으로 한 자기 문화를 하나도 양보하지 않는 거예요. 어느 사회에 들어가든지 그대로 지키고 사는 것이죠.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도 자기들의 복장, 음식, 종교를 고집하고 있어요. 철저하게 랍비 중심의 공동체에요. 안식일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 안에 다 모여 살아요. 벗어나면 안식일 법을 깨뜨리는 게 되니까. 그들은 그렇게 자기들의 정체성을 유지해갑니다. 내부의 많은 갈등과 의문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셨다는 한마디로 다 억누르는 것이죠. 또 그들이 이렇게 고집할 수 있는 것은 전도나 선교는 그들에게 없기 때문이죠. 오직 유대 민족을 위한 하나님이요 언약이니 이방인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오히려 이방인을 접촉하는 것은 부정케 하는 것이에요. 꺼리는 일이에요. 그래서 심지어 그들이 금요일에 안식일을 지키게 되면 일체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불을 켰는데 나중에 불을 끌 수 없어요. 그래서 ‘샤베스고이’라고 안식일 밤에 돌아다니면서 집집마다 불 꺼주는 일을 품행이 단정한 이방인에게 맡겨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늦은 밤 잠든 그들을 위해 불을 끄게 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철저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요.‘너희는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열려있는 종교예요. 복음을 전하려 하니 거기에는 문화의 문제가 있어요. 서로 문화가 다르거든요. 이제 여름이 되어서 우리 교회도 여름성경학교가 있고 학생들의 여름수련회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서울의 큰 교회에서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의 예배에 축도를 담당했었는데 여름성경학교를 한다기에 찾아갔습니다. 찾아가 보았다가 깜짝 놀랐어요. 보통 주일예배 때 아이들이 찬송을 안 불러요. 어린이 찬송가를 거의 안 불러요. 얘들이 왜 이렇게 찬송을 안 부르나 했는데 그날 여름성경학교 그 자리에서 너무 놀랐어요. 들어가서 보는 순간, 그 많은 애들이 선생님과 함께 강단의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몽땅 다 일어나서 막 찬양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일 날 부르던 찬송과는 많이 달라요. 랩 찬양이에요. 몸을 흔들면서. 노래 같지도 않은, 가사의 나열 같은 찬양을 부르는데 완전히 딴 세상이더라고요. 그때 제가 충격을 받았어요.‘아, 그렇구나.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다른 나라 사람만 얘기하는 게 아니로구나.’분명히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세대가 달라요. 백 년, 이백 년, 삼백 년 된 오래된 찬송을 우리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더니, 아이들 몸이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자기들이 들었던 노래와 문화와 너무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익숙한 문화, 익숙한 곡조에다가 가사를 섞어 부르게 했더니 다 일어나서 노래를 하는 거예요. 문화를 맞춰주지 못하면 다음 세대를 다 잃어버려요.

   여러분, 복음이 있어요.‘예수 생명’이라고 하는 복음이 있어요. 이 복음을 문화라는 그릇에다가 담아서 전하는 거예요. 이 시대를 따라 변하는 문화에 맞춰주지 않으면 오히려 이 복음이 변질돼요. , 재미없다고 다 조니까. 사람을 살리는 생명인데 그만 문화의 흐름에 적절하게 담아내지 못하면 다 조는 거예요. 거부하는 거예요. 안 맞는 거예요.

   몇 년 전에 제가 미국 교회를 순회하던 중에 미국에서 부흥하는 청소년 예배를 보고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마치 캄캄한 록 콘서트장에 들어간 것 같았어요. 화면에 뜨는 찬양 가사는 피의 복음이었어요.‘지금 미국교회가 이만큼 나아가고 있구나. 그렇다면 머지않아서 우리나라, 우리사회, 우리교회, 우리젊은이들에게도 이런 문화가 들어오게 될 터인데, 얼마만큼 받아들여야 될 것인가.’고민되더라고요.

   여러분, 그거 아세요. 60년대에 ‘윤복희’라는 가수가 외국에서 돌아오면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났는데 온 나라가 다 뒤집어졌잖아요. 그때 사진을 보면 지금은 오히려 촌티 나는 거예요. 겨우 무릎이 나온 미니스커트인데 온 나라가 다 뒤집어진 거예요. 그렇게 문화는 아주 예민한 부분이에요.

   복음과 문화의 문제는 그저 오늘 우리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어요. 교회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탄생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교회가 확장됩니다. 교회가 여러 지역에 세워지면서 교회 속에 조직이 만들어져요. 제도화 돼요. 그러면서 교회가 본격적으로 부딪히는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하나는 밖으로부터 오는 문제요, 하나는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예요. 밖으로부터 오는 박해가 있고 비난이 있고 오해가 있어요. 로마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찬식을 오해했어요. 핍박받는 교회가 카타콤 지하무덤 속에 들어가서 성찬식을 행하는 것을 소문으로 듣고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더라.’ 또 이것은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 라고 하는 것이 식인행위로 인식됐어요. ‘아주 무도한 자들이다. 법을 모르는 자들이다. 죽여야 된다’ 이렇게 된 거죠.

   그러니까 ‘아니다. 우리야말로 법을 지키는 자들이다. 우리야말로 나라에 충실한 국민이다. 시민이다.’ 이러한 것들을 변호하게 됐어요. 또 당대를 주름잡고 있던 그리스철학, 헬라 사람들의 깊은 관심은 진리에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 복음을 들어볼 때 너무 억지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요. 그래서 교회의 복음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이었어요. 그건 아주 무식한 자들이나 믿는 것이다. 다시 교회는 거기에 대해서 변호합니다. 아니다, 교회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다. 심지어는 교회를 변호하려고 하다보니까 이런 해석까지 나왔어요.‘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주셨고, 이방인들에게는 철학을 주셨다. 그래서 모세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나 플라톤이 철학을 가지고 신을 인식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될 것이다.’ 교회를 변호하려고 이런 해석까지도 나오게 된 것이죠.

   외부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복음을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 외부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오해하지 않도록, 복음을 오해하지 않도록 어떻게 다리를 놓을 것인가. 우리가 주일예배 때나 수요예배 때에 기도들을 하시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녹음기 틀어놓듯이 너무 상투적인 언어로 하는 것은 교회에 처음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낯설고 거친 표현이에요.

   또 하나, 내부의 문제가 있어요. 바깥사람들이 교회를 오해하지 않도록 다리를 놓았어요. 그래서 그들이 교회의 진리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통로를 놨어요. 바깥사람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다리를 놨는데 이 다리는 자칫 잘못하면 안에 있는 사람이 밖으로 나가는 통로도 되는 거예요.  

   교회 안에 ‘영지주의’라는 게 들어왔어요. ‘영지’라는 말은 영적 지식이라는 말이에요. 이게 뭐냐면, 그리스 철학을 가지고 기독교를 해석하려고 하는 거예요. 기독교에서 그리스철학을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변호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그리스철학을 가지고 기독교를 해석하려고 하는 흐름이 나왔어요. 원래 그리스철학은 이원론이거든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거룩하고 온전하고 영원한 것이고,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 육체와 같은 것들은 저급한 것이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썩을 것이고 심지어는 더러운 것이고 악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했어요.

   그러면서 우리의 구원은 영적인 구원이어야 하므로 육체의 구원은 부적절하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오히려 우리가 추구하는 구원과는 다르다, 이렇게 해석했어요. 십자가에 오신 그리스도를 부인했어요. 복음의 핵심을 부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성경이 말하는 거예요. 예수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누누이 성경은 말하기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제가 신학공부를 했던 장로회신학대학원의 교훈은 경건과 학문이에요. 무엇 때문에 학문을 하느냐.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즉 경건을 위하여 학문을 하는 거예요. 경건을 무너뜨리는 학문이 아니에요. 경건을 위한 학문을 하는 것이죠.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것이냐. 오늘 말합니다.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붙들어라. 여러분, 처음부터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다’이게 복음이에요.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길고 짧은 많은 설교들이 실려 있어요. 그런데 그 요점이 뭐냐. 예수가 그리스도다. 이게 우리 신앙의 기본이에요.

   예수가 그리스도다. 이거 아주 놀라운 얘기예요. 아주 간단하지만 이건 정말 인생의 마스터키예요. 우리의 모든 문제는 이 말씀 안에서 다 해결이 되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 고린도전서 15 3,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옛날에 하나 둘이에요? <스파르타커스>라는 영화를 어릴 때 보았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6천 명을 십자가에 매달았어요. 평생 노예생활을 하던 사람, 노예에서 자유롭게 되겠다고 칼을 뽑아 들고 덤벼들었던 사람들을 수없이 죽이고 그 중 6천 명을 붙들어서 로마에 이르는 길 양편에 매달아 죽였어요. 그렇게 죽은 사람도 많은데 뭐 유독 유대청년의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 사실이 무슨 뜻인가 하는 해석도 중요합니다. 요한일서 4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보세요. 여기 문화의 문제가 있어요.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그냥 천둥 같은 음성으로 ‘너희의 죄를 용서하노라’하지 않으셨어요. 우리가 못 알아들으니까. 그가 인간의 문화 속에 오셨어요. 인간으로 오셨어요. 인간의 모든 삶을 몸소 다 겪으셨어요. 고통을 아셨어요. 그리고 2천 년 전 유대 땅에 오셨기에 당시의 문화대로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만일 예수께서 지금 오셨다면 십자가에 죽진 않으시죠. , 지금은 죄인을 십자가에 처형하진 않거든요. 다른 모습으로 죽으셨을 거예요. 그 당시의 문화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그렇다면 그 결과 어떻게 됐느냐. 요한일서 4 15절에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이게 예수 이름의 놀라운 비밀이에요. 요즘 휴대폰 안 가지고 계신 분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괜히 비싼 휴대폰을 사신 거예요. 기능이 얼마나 복잡한대요. 그저 걸고 받기만 하려면 뭐 그렇게 비싼 걸 사셨어요. 그냥 제일 싼걸 사시지. 휴대폰 기능 중에 제일 중요한 건 걸고 받는 기능이에요. 다른 건 몰라도 돼요. 우리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에요. 그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해요.

   한국에 나가게 되면 아주 시원하게 고속도로를 달리며 운전하고 싶더라고요. 여기서는 남이 태워다 주는 대로만 다니니까 아주 답답해 죽겠어요. 한국에서 장거리를 가게 되면 제가 잘 아는 집사님이 운영하는 카센터에 꼭 들립니다. 그래서 한 번 봐달라고 하면 이 분이 얼마나 친절한지 지금 이 차의 상태는 이렇다 하고 이야기를 해줍니다. 얼른 손봐줄 것은 봐주고,“이번에 재밌게 다녀오시고 나중에 몇 군데를 손봐야 됩니다.”얼마나 친절한지 그분에게는 돈이 아깝지 않더라고요.

   차를 직접 만들 필요는 없어요. 그건 기술자들이 만들면 돼요. 심지어는 차가 어떻게 작동하느냐 원리를 알면 좋지만 몰라도 괜찮아요. 그러나 운전은 해야 돼요.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 이게 운전이에요. 놀라운 비밀이에요. 예수 이름을 찬양하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의 핵심과 결론인 오직 예수 그분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제가 자동차 정비를 하는 집사님의 조언대로 해서 차가 고장 난 적이 없었어요. 아주 편안하게 지내다가 왔어요.

   성경이 오늘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에게는 기름부음이 있다. 이건 성령의 역사를 말해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들으려 할 때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여러분, 성경에는 실로 놀라운 원리가 있어요. 우리가 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마는 우리 신앙에도 그런 암이 있어요. 인생의 문제가 뭡니까? 성경이 말하는 인생의 문제는 죄의 문제에요. 그리고 율법의 저주예요. 율법은 거룩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지킬 능력이 없어요. 우리를 책망해요. 우리가 그것을 알면 알수록 그 저주에 묶이게 돼요. 결국은 심판 당하게 돼요. 그 배후에 사단의 역사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어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어요. 심판은 떠나갔어요. 저주는 떠나갔어요. 그래서 사주팔자, 관상, 택일은 예수 믿는 사람에겐 아무 효력이 없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의 축복과 권세예요. 그래서 오늘 말하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영원한 생명이다. 오래 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영원한 생명의 비밀은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영혼,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넘치는 사랑의 삶,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에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우리가 늘 누리며 살겠습니까. 현대인에게 있어서 더 이상 암은 남의 집 이야기가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암세포가 있어요. 아직은 작아서 검사에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에요. 누구에게나 있어요. 다만 면역체계가 튼튼한 사람은 그걸 누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떤 유전적인 요인이나 환경이나 식생활이나 특별히 스트레스를 받을 때 커져버리는 거예요. 드러나는 거예요. 그래서 치료받게 되는 거예요. 보통 화학적 치료를 하죠. 방사선으로 치료를 하죠. 그러면 암세포는 죽지만 옆에 있는 건강한 세포들도 다치는 거예요. 부작용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식생활을 알칼리성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 또 늘 운동을 해서 세포에 신선한 산소를 공급해야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암은 그저 몸의 질병이 아니라 총체적인 거예요. 마음의 질병이기 때문에 마음이 사랑으로 힘이 넘치고 있을 때 그것이 최고의 치료제라는 거예요.

   신앙도 그래요.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되겠죠. 마치 화학적 치료 같아요.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죠. 그러나 온전하지 않아요.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해요. 우리의 식생활을 바꾸듯이 말씀과 기도가 늘 우리 삶에 있어야 돼요. 또 운동을 해서 신선한 산소를 공급하듯이 우리의 삶 속에 순종이 있어야 돼요. 그럴 때에 사랑이 우리의 암을 치료하는 특효약이 되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삶에 넘칠 때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에요. 복된 사람이에요.

   유명한 크리스천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확신에서 합리적 이론이 나오는 것이지, 합리적 이론에서 확신을 얻는 것이 아니다.”여러분 복음을 듣기만 해서는 안되죠. 믿음을 가지고 순종할 때 복음의 능력을 체험케 됩니다. 요한일서 5 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또 다시 말합니다. 요한일서 3 23절에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이것이 계명이다.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넘치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