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그가 이루시리라[창조적일탈,바울삼층천올라가서하나님을뵘]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08:06

080601 그가 이루시리라 (살전 5:16-24)

성경본문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어느 회사원이 매사에 의욕이 없고 싫증과 권태에 빠져서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이 사람의 원인은 뭐냐. 힘든 게 없다는 것, 그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스트레스는 과잉도 문제지만 스트레스가 없다, 결핍도 문제에요. 변화 속도가 지극히 빠르고 온갖 매체를 통해서 아주 말초적인 감각이 넘쳐흐르는 현대사회지만 그것이 계속된다면 그건 단조로운 반복일 뿐이죠. 지루해지는 거죠. 이런 권태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이냐. 일탈, 벗어난다. 거기에도 두 가지가 있어요. 파괴적인 일탈이 있고, 창조적인 일탈이 있어요. 그러니까 무슨 중독에 빠진다, 폭력을 행사한다, 불륜에 빠진다, 이것은 파괴적인 일탈이죠. 창조적인 일탈은 꽃구경을 간다, 여행을 간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취미활동을 한다, 공연을 보러 간다. 공연을 보러 가는 것도 삶을 환기시키는 창조적 일탈이라면 공연을 직접 준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어제 ‘내 마음에 한 노래 있어’ 자선공연을 했습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잘했어요. 그러나 누구를 위해서 했습니까. 제일 수지맞은 사람들은 그 무대에 섰던 당사자에요. 누구를 위해서 했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뭔가 생각을 잘못한 거죠. 도파민이라고 하는 호르몬이 분비될 때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지만 그것만 나오면 그것도 지루해진대요.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오는 코티졸이라고 하는 것이 같이 분비되어야 그 만족감이 오래오래 지속된대요.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고 능동적으로 창조적 일탈행위를 통해서, 다시 말하면 능동적인 도전을 만듦으로서 적당한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적당한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살아갈 때 거기에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만족은 어디 있느냐.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창조적인 삶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말은 짧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면 어려운 얘기에요. 아니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어요. 또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어요.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덕목이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인 것이죠. , 교리를 많이 아는 것, 중요하지 않아요. 공부를 많이 했다, 그것도 한 방편일 뿐이에요. 결국에는 그 얼굴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할 때 그 결론이 감사로 맺어지는 사람, 이게 그리스도인 아니겠어요. 한번 도전해 볼 만하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 체험을 얘기해요. 자기를 객관화 시켜서 얘기해요. 내가 어떤 사람을 아는데 그가 삼층천에 올라갔었다. 헬라적 사고방식으로 눈을 들어 하늘을 볼 때 구름을 봅니다. 1단계에요. 그리고 밤에 저 멀리 별을 봅니다. 더 높은 하늘이에요. 그건 2단계에요.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높은 곳에 신이 계시다 라고 생각했으니까 헬라적 표현을 빌어서 말하는 거예요. 내가 삼층천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뵈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을 듣고 보았다. 환상과 계시를 보았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것을 허락해 주셨겠어요. 사도 바울이 선교활동 가운데 고난 받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배가 파선되기도 하고, 굶기도 하고, 목마름에 고통당하기도 하고, 서른아홉 대씩 때리는 매를 다섯 번이나 맞기도 하고. 나중에는 살 소망을 다 잃어버리는 고통의 연속이었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환상과 계시를 보여주신 거예요. , 그 핍박과 환란을 이길 수 있도록. 그것 없이 어떻게 그 고통을 이기겠어요. 나는 왜 그런 환상과 계시가 없지? 간단히 얘기하면 고통이 없기 때문이죠. 도전하지 않는데, 자고 있는데, 환상과 계시를 왜 보여주겠어요.

그런데 낙심치 않도록 환상과 계시를 보여주신 하나님이 이번에는 사도 바울에게 질병을 주셨어요. 사도 바울이 그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렇게 말했어요.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 한발 더 나가서 이렇게 말했어요.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때문에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고통이 있으니까. 이것만 없으면 멋있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할 텐데 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세 번이나 하나님께 매달려서 간구했다고 말합니다. ‘이 병을 고쳐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이 응답해주셨어요. 어떻게 응답해주셨느냐. ‘내게 주신 그 환상과 계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교만하지 않도록., 사람은요, 안되면 낙심하고 잘되면 교만하고. 이걸 피할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도 바울에게 두 가지를 다 주신 거예요. 이 환란이라는 상황 속에서 낙심하지 않도록 환상과 계시를 주시고, 또 교만하지 않도록 질병을 주시고.

사도 바울이 이걸 깨달았어요. 환상과 계시도 나를 위해 주신 은혜인데, 이 질병도 나를 위하여 주셨구나.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충분하다 이거에요. 내가 기대했던 건 아니에요. 내가 기대했던 건 아니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이것으로 충분하니 이것으로 만족하라.’ 우리의 욕심을 다 채울 수 있습니까. 오늘 이것으로 만족하라. 질병을 고쳐주시는 대신에 ‘누가’라고 하는 의사를 사도 바울이 죽는 그날까지 선교여행의 동반자로 붙여주셨어요. 많은 사람이 사도 바울 곁에 왔다가 떠나갔지만 누가 만큼은 사도 바울이 마지막 순교하는 그 자리까지 함께 했어요. 그러면서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성령에 붙들려 산 사람들의 이야기.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을 이어받아 가지고 성령에 이끌려 산 사람들을 기록했어요.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주치의는 누구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남편과 아내로 살아가시는 분들이라면 남편이 내 주치의고, 아내가 내 주치의에요. 근데 좀 시원찮아서 문제에요. 잘 못 고쳐요. 그러나 진단은 정확해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좀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지, 혼자 가만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에요. 그 주치의의 진단과 처방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 성인이 따로 없어요, 이 사람이 성인이에요. 성경에 나와 있어요. 우리 각 사람을 돕는 배필로 하나님이 정확하게 짝지어 주신 거예요. 믿음으로 받아들이세요. 내 기분을 조용히 내려놓고 인정하세요. 그런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에요. 기도를 크게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내를 존중하는 사람, 남편을 존중하는 사람.

옛날 중국의 고위 관리가 ‘공자’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공자의 수제자인 ‘자공’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공자는 성인이십니다. 어찌 그리도 재능이 많으십니까.” 그랬더니 자공이 그 말을 받아서 말합니다. “그분은 하늘이 내신 성인이시기에 많은 재능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얘기를 옆에서 들은 공자가 자공을 꾸짖으면서 말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어렸을 때 미천하였기에, 어려서 비천한 일들을 많이 겪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아버지는 ‘숙량흘’이라는 사람이었는데 63세에 15살 난 처녀를 데려다가 결혼해서 낳은 자식이 공자에요. 원래 전처가 있었는데 딸만 아홉을 낳았대요. 고대사회에서 아들을 낳아야 되겠다는 욕심에 손녀딸 같은 애를 데려다가 아이를 난 거예요. 그러니 주위에서 얼마나 조롱을 했겠습니까. 그리고는 공자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어요. 뒷감당은 누가 하라고. 그래서 공자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함께 온갖 어려움을 다 겪은 거죠. 남의 집 아들같이 제 때에 제대로 공부를 한 게 아니에요. 고생부터 한 거예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15살 때에 어느 한 세력가 집안의 일꾼들과 사귀면서 같이 소도 키우고 하면서 배우는 거예요. 또 그 집안의 자제들을 알게 됐어요. 그들을 통해서 책을 빌려 보게 됐어요. 15살에 ‘지학(志學), 나도 공부해야 되겠다 뜻을 세웠어요. 어렵게 빌린 책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한 거예요. 공자는 부잣집의 창고를 관리하고 회계장부를 챙기는 일을 맡아서 아주 똑똑하게 잘 한 거죠. 또 어느 집안의 가축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됐는데 이미 소도 길러보고 했기 때문에 아주 일을 잘 도왔던 것이죠. 여러분, 좋은 환경이 좋은 거죠. 그러나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내게 주어진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하느냐 하는 능력이 중요한 거죠.

그런 공자였지마는 어느 제자가 공자에게 내세 일을 물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랬더니 공자가 ‘살아 생전의 일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죽은 다음의 일을 묻느냐. 괴력난신(怪力亂神), 괴상한 일들, 귀신들의 일을 나에게 묻지 말아라.’ 아주 솔직한 사람이죠. 철저하게 현세적이고 현실적인 윤리죠. 우리는 이 공자의 모습에서 진지한 삶의 자세를 배우면서 동시에 공자조차도 알 수 없었던 그리스도인이 갖는 놀라운 비밀이 있어요.

오늘 성경이 말해요.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가. 그런 삶이 가능한 원동력을 다시 얘기합니다. 첫째는 성령을 소멸치 말라. 이 말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꺼버리겠습니까. 아니요, 그런 게 아니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셔요. 그분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했어요. 그러므로 여기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 라고 하는 말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때그때 주시는 감동이 있어요. 그런 감동의 불씨를 끄지 말라. 나의 선입견으로, 나의 경험으로, 또 일상의 분주함 속에 그만 갇혀 가지고 세미한 성령의 음성을 놓치지 말라 그런 말이죠.

‘성령충만’이라는 표현을 교회에서 많이 씁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을 많이 갖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건 소유가 아니에요, 존재에요. 얼마나 내가 성령을 인정하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느냐. 성경은 말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 , 의를 가지신 인격이시다. 그분은 내게 말씀하신다. 때로는 내가 불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근심하신다. 그리고 내가 순종할 때 기뻐하신다. 인격이에요. 인격과 인격의 관계잖아요.

성령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 19절에서 22절을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렇게 말하면서 세 가지를 얘기해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라’ 예배하라는 거예요. 어디 가서 성령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겠어요. 절대 들을 수 없어요. 예배하는 가운데 ‘아, 그분이 계시는구나, 내 안에 함께 하시는구나, 나를 인도하시는구나.’ 두 번째는 모든 일에 감사하라. 감사는 내가 막 애를 써서 감사하는 게 아니고 말씀을 깨달을 때 감사가 나오는 거죠. 세 번째는 순종하라. 순종의 첫 단계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순종하고 사랑하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숨겨진 비밀은 뭐냐. 생명력 있는 삶의 원동력은 뭐냐. 성령을 소멸치 않는 것, 그분을 인정하는 것, 그분을 따라가는 것, 순종하는 것, 그것이 성령충만이죠.

두 번째는 ‘예언을 멸시치 말라’ 그랬어요. 초대교회는 아직 지금같이 이렇게 성경이 다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그러했기 때문에 그 시대는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어느 개인이나 교회에게 필요한 말씀을 전하게 하셨어요. 순간순간 감동을 주셔서 전하게도 하셨어요.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성경말씀이 완성되어서 이 말씀을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전하게 하셔요. 물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니까 지금 이 시대에도 순간순간 감동을 주셔서 예언을 하게도 하셔요. 그러나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방법은 주일에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가운데 말씀을 듣게 하시고 우리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모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함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죠.

‘예언을 멸시치 말아라’ 하는 것을 오늘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내게 주시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죠. 가장 멋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게 바로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이다 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에요. 행복한 사람이에요.

말씀 중의 말씀이 뭐냐. ‘예수가 그리스도다.’ 호텔에 가면 방마다 키가 있잖아요. 그러나 그 키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이마로 문을 깨부술 수 있어요? 못해요. 그럴 때는 프론트에 빨리 연락하죠. 그러면 사람이 오잖아요. 그 사람이 뭘 쥐고 있어요.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어요. 어느 방이든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가지고 있어요. 예수가 그리스도다, 이 말은 예수님은 내 인생 모든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오늘 내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응답을 쥐고 계신 분이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알고 섬긴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세 번째는 하나님이 이루신다. 하나님이 부르셨어요. 하나님이 자기의 시간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연단하셔요. 우리를 그대로는 못쓰거든요. 우리가 다 원자재에요. 다이아몬드를 얻으려면 제련하고 깎아내야 하듯이 우리가 부족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딱 맞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연단하셔요. 그리고는 끝내 그의 뜻을 아름답게 이루셔요.

지난 주간에 인도네시아에 나와 있는 한인선교사 수련회가 수라바야에서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서울의 감자탕교회로 유명한 광염교회 ‘조현삼’ 목사님이 오셨어요. 그분은 국내외에 재난이 있을 때 선착순으로 교인들과 더불어 뛰어가는 교회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오셨어요. 그분이 주강사가 되셔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제가 이번에 깜짝 놀란 게 있어요. 새벽기도회가 며칠 있었는데 새벽기도회 강사가 누군가 봤더니, 광염교회 여전도사님이 오셨는데 조목사님이 그분에게 새벽강단을 맡기신 거예요. 여기 선교사로 나와서 10, 15, 20, 25년 되신 분도 있으니까 그 여전도사님은 후배로 말하면 한참 후배가 되는 거죠. 그래서 주최측에서는 처음에 새벽기도 강사이름을 안 썼대요. 선교사님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해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쓰지 않았대요. 수련회 참석해서 팸플릿을 받아보니까 거기에 써있는데 ‘누구야 이 사람이?’ 그랬는데요, 참 은혜가 있었어요.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이시다.

10년 전에 여전도사님이 나이 스물여섯에 총신대원을 들어갔어요. 목회할 생각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공부 좀 해보려구요. 그러다가 조현삼 목사님이 좋아서 그 교회에 가서 섬기다가 목사님이 교육전도사로 일하라고 하신 거예요. 어느 날 부르셨어요. “내가 기도를 해보니까 우리나라에 동남아시아에서 온 해외근로자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을 잘 섬기라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셨는데 이전도사가 그 파트를 맡아서 좀 해봐.” “저는 영어도 잘 못하는데요.” “괜찮아. 그래도 해봐.” 막 돌아서서 나가는데 다시 한 번 불러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데 아직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 가서 전도해가지고 해.” 원래 그 교회가 상계동에 있는데 그날부터 학교 갔다 오면 집사님과 함께 밤낮 의정부로 가는 거예요. 거기 가서 동남아 근로자들을 만납니다. 인도네시아 사람도 만나고 스리랑카 사람도 만나고 몽골 사람도 만나고 하면서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게 제대로 됐겠어요? 날마다 기도할 수밖에 없지요. 기껏 약속해놓고 가면 안 나오는 거예요. 두 명, 세 명 모이고 어느 날 드디어 한 명이 나왔대요. 실망을 해가지고 주일예배 때 뒷자리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목사님이 그걸 보셨어요. 예배를 마치고 불렀어요. “왜 그러는 거야?” “어제 글쎄 기껏 많은 사람들하고 약속을 했는데 예배드리려고 가보니까 한 사람만 왔더라구요.” 목사님이 야단을 하신 거예요.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데. 한 사람이 왔는데 왜 울고 낙망을 하냐.” 그런 연단을 10년 동안 받은 거예요. 제가 여전도사님을 보고 은혜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식사하는 자리에서 잠깐 지나쳤는데 못 알아봤어요.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얼굴에 흉이 크게 있더라구요. 굉장히 마음에 장애가 되었겠다. 아마도 목사님이 틀림없이 그에게 그러한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전을 준거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강하게 권면한 거죠. 그가 10년의 연단을 통해서 자기의 장애에 묶여 있던 생각을 떨쳐버리고 지금은 목사님과 함께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가 된 거죠. 설교도 너무 잘해요. , 하나님이 저렇게 사람을 고쳐서 쓰시는구나.

여러분, 우리 안에서 일을 행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연단하시고 기어코 이루셔요.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을 깨닫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셔요. 저는 특별히 바나바의 은혜가 귀하다고 믿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데려다가 사람들에게 소개시키고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교회 일을 시켰는데 나중에 하나님이 어떡해요. 순서를 바꾸잖아요. 바울을 앞세우잖아요. , 서로의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바나바는 사람을 잘 섬기는 사람이고 돕는 사람이에요. 바울은 저돌적으로 부딪히는 사람이에요. 거친 현장 속에서는 바울이 앞장서는 게 좋겠다 해가지고 바울을 앞장세운 거예요. 일을 해보면요, 회장일이 맞는 사람이 있고 총무일이 맞는 사람이 있어요. 이걸 바꿔서 일하려하면 그 사람들도 괴롭고 그 모임은 망하는 거예요. 자꾸 나이 따지고 순서 따지는 것은 건강한 조직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다 뒤집어엎는 게 건강한 것도 아니에요. 은사대로. 여러분, 종의 자유함을 누려야 돼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셨어요. 받은 바대로 일하는 거예요. 종의 자유함을 누리세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으니,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시니, 하나님이 기어코 이루실 것이니, 우리는 단 하나, 주시는 말씀에 감사함으로 살겠습니다. 여기에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불러주시고 재난과 전쟁과 기근과 눈물과 아픔이 넘쳐흐르는 이 세상 속에서 사랑과 은총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연단하시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에 들어 쓰시고 기어코 우리 삶에 풍성한 열매를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시니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하며 감격하며 살게 하시고 성령의 음성을 따르며 살게 하시고,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