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섬김의 리더십[성경책을 살려내는 두가지=설교+성령의 감동]/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08:33

섬김의 리더십

2008 5 1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태복음 23:8~12)

 

여러분 박지성 선수를 잘 아실 겁니다.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전선수가 되었지요. 얼마 전에 맨유 팀이 영국 프로 축구 프리미어리그에 연속 우승을 했고 며칠 후에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박지성 선수는 아주 행운아다.’그런 말을 해요. 그가 소속된 팀들이 가서 다 우승을 했거든요. 또 이번 시즌에서는 선발 출전하면 패하지 않는다는 그런 기록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살펴보면 행운아라기보다는 그는 노력형이지요. 요즘 일반 시청자들도 축구는 내로라하는 전문가 아닙니까. 박지성 선수에 대한 여러 가지 평이 있었습니다만‘감독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감독의 전략을 가장 충실히 따른다’고 하는 것이지요. 퍼거슨 감독은 공격과 수비를 같이 할 수 있는 선수를 선호하고 빠른 역습과 빠른 패스 그리고 찬스를 만드는 선수를 기대하는데, 그 팀에 들어와 있는 선수들이 다 내로라하는 최고의 선수들이지만 개인플레이가 심하다는 거지요. 그런데 유독 박지성 만큼은 감독의 요구를 철저하게 따르고 소화한다, 그래서 팀을 살리는 선수다. 어느 신문에서는 이렇게 얘기했어요.‘부족한 재능을 투지와 성실로 메꾸었다.’그러니까 전문가의 눈으로 판단할 때 박지성 선수는 재능은 좀 부족하다는 거예요. 우리는‘그가 최고다’라고 얘기 하지만 전문가들이 볼 때는‘좀 부족하다’그러나 그것을 투지와 성실로 메꾸었다는 것입니다. ‘팀을 살린다.’이것이 바로‘섬김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겠죠.

   목사나 교사는 그룹을 이끌어 가는 리더라고 얘기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최고의 덕목은 자기 성공이 아니라 자기가 이끌고 있는 팀 구성원 모두의 성공이지요. 그 생각과 방향이 달라야 되는 것이지요. 그들의 모델이 되는 것이지요. 어떤 모델을 만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가 중요하지요.

   오늘 본문은 유대인의 신앙교육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한마디 하신 것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에게는‘쉐마’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 6 4절에서 9절 말씀을 흔히 쉐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대목의 첫 단어가 쉐마이기 때문이지요.‘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우 아도나이 에하드’이렇게 시작되는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구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그것을 또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

결국 뭘 기록하라고 하는 것이냐 하면 애굽에 종살이 하던 우리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건져내신 출애굽의 구원 사건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고 네 자녀에게 가르쳐라, 그 귀한 말씀을 손목에 매라, 네 미간에 붙여라, 집에 들어가는 모든 문설주에 홈을 파고 말씀을 기록해서 집어넣고 그것을 만지면서 들어가고 만지면서 나와라. 얼마나 철저한지 모릅니다. 그들은 경문經文이라는 자그마한 말씀 상자를 기도할 때에 미간에다가 띠를 만들어서 붙입니다. 그리고 팔뚝에 붙여요. 그래서 심장 가까운 곳에 말씀이 놓일 수 있도록  하고 기도하는 거지요. 그렇게 하루에 몇 차례씩 기도하는 거지요. 또 문설주에 홈을 파고 말씀을 집어넣고 말씀을 만지면서 출입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얼마나 철저한지 몰라요.

   이 신앙교육은 부모가 자녀에게 하게 돼 있어요. 이 모든 신앙교육을 총괄하기 위해서 ‘랍비’가 존재했어요. 랍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니까 오늘날의 목사와 같은 존재들이지요. 랍비의 말씀 해석을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따랐어요. 그 랍비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어요. 랍비라는 말은 선생님보다 더 높여서 부르는 칭호에요.‘나의 주인’이라는 말이에요. 대단한 칭호지요. 심지어는 랍비를 아버지라고 불렀어요. 열왕기하 2 12절에 보면 엘리야가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 엘리사가 뭐라고 얘기합니까.‘내 아버지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랍비들은 이렇게 말해요.‘유대교는 랍비의 종교다.’유대교에 수많은 경전이 있지만 그건 사실 한낱 기록일 뿐이다. 랍비가 펴서 읽으며 해석할 때 그 말씀이 살아있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랍비들의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늘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한마디로 ‘랍비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자들이다.’그렇게 말했어요. 구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인생의 짐을 더 얹는 사람들이다.

   오래 전에 강남에 유명한 영어 학원의 학원장을 만나서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목사님 저희 집안은 대대로 예수 믿는 집안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말 할 것도 없고 저희 형제들 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고 유독 우리 집안에서 저만 그렇게 하지 못해서 집안 식구들이 모이면 꼭 핀잔을 듣습니다. 저는 꼭 미운오리새끼 같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들어보십시오. 가만히 교회에서 일하는 것 보니까 이건 뭐 밤낮 예배를 가야 되고, 기도회 가야 되고, 봉사 한다고 가야 되고 그러니 내 뭐 좀 해보고 싶어도 도저히 따라 갈 수 없겠던데요. 그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제가 목사를 하지요.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요. 그러나 그렇게 보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일을 하되 그 일을 감당할 힘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넉넉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느냐. 일의 양이 문제가 아니에요. 천하장사라도 몸살을 앓으면 그 힘 다 어디 갔어요. 끙끙거리잖아요. 힘들어 하잖아요.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크고 작으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마음의 여유가 있고,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은혜가 있느냐. 사실 우리 교회는 그렇게 일을 많이 시키지 않습니다. 물론 많이 일하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시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일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내 인생을 어떻게 이끄시는가를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좀 심하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스스로를 랍비라고 부르지 말고 선생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나 지도자라 불려지기를 기대하지 말라. 예수님의 의도는 뭡니까. 신앙생활에서 나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생일지라도 랍비일지라도 지도자일지라도 먼저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먼저 그리스도께 집중하라, 그 말씀이죠. 요한복음 1313절에 보니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님이라 또는 주님이라 불렀으니 너희 말이 옳도다. 과연 내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너희의 발을 씻겨서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그렇게 할 때 너희에게 복이 있으리라.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려요. 그러나 또 하나,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길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셔요. 그분이 모델이셔요.‘그렇게 행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다.’예수님의 약속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가르치셨습니까? 첫 번째는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셨어요. 마태복음 11 28절에서 30, 그 유명한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우니라.

 

예수님이 단언하건대 랍비들의 종교교육과 그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짐을 더 얹는 것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방식은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면서 짐을 가볍게 하시는 그 원리를 설명합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우선 마음이 온유한 자가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그러지요.‘저 분은 참 온유하다.’성격이 부드러운 분이 있지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온유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성격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사람의 성격에는 다 강점과 약점이 있어요. 온유해 보이는 사람은 다른 면으로 보면 유약하잖아요. , 아주 강해 보이는 사람은 때로 보면 거친 면이 있잖아요. 그런 태생적인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으로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말해요. 그래서 유명한 팔복의 말씀 가운데‘심령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온 세상을 차지할 것이다.’온유한 사람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될 것이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잘난체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싫어해요. 잘난체하는 사람은 심지어 그 아들도 싫어하고 딸도 싫어해요. 누구를 좋아하나요? 상대방을 섬기는 사람이지요.

   예수님께서 섬기는 모범을 보이시려고 발을 씻겨 주셨어요. 그렇다고 아무 발이나 씻기려 해서는 안 되지요. 핵심은 뭡니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 건강하게 더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세워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그로 하여금 복음의 자유함을 누리도록 죄 사함의 기쁨을 발견하도록. , 그러려면 내가 먼저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리고 자유함의 기쁨을 누려야지요. 오늘날 정말 사람들이 애타게 찾는 게 뭐예요? 자기 발 씻겨 줄 사람을 찾아요?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을 어떻게 하면 내려놓을 수 있을까? 그들 앞에 모델이 되어서 죄 사함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이게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지요.

   또 겸손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겸손이야말로 믿는 자의 으뜸가는 덕목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교만이에요. 사단의 가장 큰 특징이 자기를 높이다가 하나님 앞에서 꺾어지고 부러진 거지요. 겸손한 사람은 사실은 남을 가르친다 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가르치는 것도 아니에요. 보여주는 것일 뿐이에요. 우리가 목사라든지 교사라든지 주일학교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뭘 알아서 가르친다 하겠어요? 그게 아니에요. 내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사랑하신다 하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저는 예전에 이러한 일화를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홍정길 목사님을 아실 겁니다. 남서울은혜교회를 담임하시는데요. 그분이 예전에 남서울교회를 섬기실 때에 있었던 일이에요. 출애굽기 12장에 유월절에 관한 말씀을 읽고 설교를 하셨어요. 그런데 이런 본문이 있어요.

 

유월절을 맞는 그 밤에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양을 잡아 구워서 먹되 짐을 다 꾸리고 떠날 준비를 하고, 지팡이를 손에 잡은 채로 그것을 급히 구워 먹으라. 그리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다 소화하라.

 

이런 표현이 있어요. 그런데 목사님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셨나 하면 그야말로 소화消化로 해석하셨어요. 빨리빨리 먹었으니 빨리 빨리 소화시켜라. 그래야 집 떠날 게 아니냐. 예배를 마친 후 어째 마음이 편치 않아서 다시 찾아보니까 아, 글쎄 이 소화가 그게 아니에요. 흔히 우리가 불을 끌 때, 소화燒火한다 그러잖아요. 소화전消火栓의 소화에요. 그러니까 먹다 남은 양고기를 내버려두지 말고 다 태워버려라 그 말이에요. 고민에 빠졌어요. 그 다음 주일날 그 본문 그 제목으로 다시 설교하셨어요.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뭐 지난주 무슨 설교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듣습니다. 그런데 듣다보니 어째 좀 이상하다, 예화도 같고. 목사님이 고백하신 거예요.“여러분,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설교를 준비할 때 소화를, 그거 빨리 먹고 소화시키라고 그랬는데 그게 아니고 태워버리라 였습니다. 설교를 너무 준비 없이 했습니다. 죄송합니다.”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이 목사님이 온 교인들에게 더 신뢰를 얻었대요.‘우리 목사님은 정직한 분이다.

   겸손하니까 가능한 거예요. 사실 정직과 진실은 너무 어렵지요. 그러나 말이에요, 어렵다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 뒤집어 생각해 보세요.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허물뿐이잖아요. 솔직하게 자신을 고백한다면 날마다 실수하고 잘못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잖아요. 이제 예수님께서 온유하고 겸손함이 진정으로 쉼을 얻고 자유함을 얻는 비밀임을 말씀하셔요. 그러면 이렇게 랍비들의 신앙교육과 예수님의 신앙교육의 결정적인 차이, 하나는 짐을 더해 얹어버리고 하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고 진정한 쉼을 주는 결정적 차이가 뭐냐. 예수님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했느냐 여기에 있어요. 랍비들은 하나님을 저 멀리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분으로만 이해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달랐어요.‘아바 아버지여’그랬어요.‘아바’라고 하는 말은 어린 아이들이‘아빠’하고 부르는 말과 똑같아요. 하나님을 그렇게 가까이 느끼고 있어요.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에요. 너무나 구체적인 언어에요. 하나님을 내 안에 살아계신 분으로 고백하는 신앙. 여기서부터 차이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하나님 아버지가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오늘 여러분이 어디서 일하시든지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일하신다. 이 고백이 우리 신앙을 살아 움직이는 신앙으로 바꾸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틀렸을 때 랍비들은 성경을 아주 복잡하게 해석합니다.

   저 전북 임실에 가면 ‘옥정호’라는 인공호수가 있어요. 그 지역에 댐을 만들다 보니 수몰이 돼 인공호수가 넓게 만들어 졌어요. 그러다 보니 거기서 살던 한 가족이 마을은 수몰됐지만 고향을 떠나지 않고 거기 사는 거예요. 그 인공호수에 섬이 생긴 거지요. 그 섬에 30년 째 살아요. 육지에서 그 섬에 들어가려면 나룻배로 30분을 저어 가야 돼요. 물론 거기엔 전기도 없죠. 호롱불 켜고 두 노인네가 그러고 살고 있어요. 산 중턱에 돌밭을 일구고 갈아서 이것저것 심어 거두며 살고 있어요. 30년 전 젊을 때 처음 들어와 살 때는 해 볼만 했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나날이 노쇠해져가면서 지내기가 쉽지 않아요. 희망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이분들에게는 6남매가 있습니다. 주말만 되면 셋째 아들부부가 찾아와요. 그런데 이 아들에게 청각장애가 있어요. 아들부부 둘 다 청각장애가 있어요. 읍내로 나가 힘들게 노동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말만 되면 부모님을 찾아서 들어오는 거예요. 이야기도 나누고 같이 식사도 하고, 또 부모님이 어렵게 일하는 돌밭에 가서 돌도 걸러내고. 그런데 다행히 며느리의 청각장애가 조금 남편보다 덜해서 어색하긴 하지만 조금 말을 해요. 그런데 그 말이 얼마나 부모를 위하는 말인지 몰라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부모에게 위로를 줘요. 이렇게 말합니다.“우리가 나중에 여기 들어와서 살 거예요.”부모가 너무 기뻐하는 거예요.“언제 들어와 살래? 나이 70이 돼서?”“아니요, 50이 돼서 들어와 살 거예요.”“그래, 그래. 어서 들어와. 너희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가 이 밭을 다 일궈 옥토로 만들어 놓을게.”그리곤 또 헤어지고... 저는 그걸 보고 참 가진 게 죄로구나 했습니다. 부모나 청각장애 아들부부나 가진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러나 놀랍게도 부모를 위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어요. 아들 며느리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요. 며느리에게 그래요.“아무것도 없는 집에 시집 와서 고생이 많구나.”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따뜻한지 몰라요. 돈은 없어요. 그런데 넉넉한 사랑이 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을‘아바 아버지,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그 음성을 날마다 들어요. 그것이 신앙의 비밀이에요.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가더라도 또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모든 말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리라. 교회는 이제 어떻게 신앙교육을 할까요? 루터는 이런 말을 했어요. ‘성경책은 죽은 책이다. 이 죽은 성경책을 살려내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목사의 설교요, 그리고 성령의 감동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역사가 되게 하시고 이제 교회를 세우시고 목사를 세워서 말씀을 전하게 하셔요.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에요. 여기에 성령의 감동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하셔요. 우리의 생각을 열게 하셔요. 그러면서 듣게 하셔요.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목사가 바쁜 것은 경건이 아니라 경박함이다. 헌신이 아니라 망신의 징조다.’이렇게 얘기했어요. 그 무슨 말이에요? 왜 바쁘냐 이거에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올바로 하라는 거예요. 바쁘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에요. 자기를 드러내려는 자기 욕심에 매여 있거나 아니면 지혜가 모자라 게으르거나.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일에 우선순위를 정해서 그 일에 먼저 깊이 마음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얼마나 병자가 많았는지 몰라요. 얼마나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는지 몰라요. 그러나 예수님이 다 쫓아다니면서 죽은 사람 다 일으키고 병자를 다 고친 것은 아니에요.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도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저물면 감람산으로 물러가서 쉬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깨어 있으라.’ 여러분 분주한 거 잘하는 거 아닙니다. 일을 줄이세요.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세요. 가장 중요한 것만 하세요. 꼭 필요한 것만 하세요. 그러면서 깨어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들을 수 있도록 믿음의 안테나를 항상 세워야 돼요.

   높은 산에 수도원이 있습니다. 어느 청년이 그 수도원에 들어오려고 뻘뻘 땀을 흘리면서 올라왔어요. 문에 왔더니 문 앞에서 시험을 봅니다.“그래, 올라오는 동안에 바람 소리를 듣고 물소리를 듣고 구름을 보았습니까?”그랬더니 청년이 대답합니다.“아니요, 저는 여기 열심히 올라오느라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그랬더니“바람과 물과 구름의 설교를 듣지 못한 자는 여기 들어올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 눈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지어는 우리가 고통 받는 어려운 문제 속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있어요. 응답이 있어요. 내가 세운 계획 속에 파묻혀서 분주하게 다니지 마세요. 성령께서 내게 지금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한마디가 나를 살리는 거예요. 그 한마디가 이번 한 주간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그런 은혜로 살아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