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마중물=Water priming the pump]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08:46

080504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삼상 3:8-10)

성경본문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우리나라를 사상적으로 지배했던 유교의 인간관은 공자의 그 유명한 군자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이 열 다섯에 지학志學,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리고 나이 서른에 이립而立, 스스로 섰다. 사십 세에는 불혹不惑,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십에는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다. 육십 세에는 이순耳順, 귀가 부드러워져서 누가 어떤 거친 말을 하더라도 다 받아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칠십에는 종심從心, 내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이죠.

성경 역시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여러 곳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인간관은 무엇이냐.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Image of God 하나님의 이미지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이냐.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의 대체적인 해석은 하나님과 관계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과 내가 지금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에 늘 우리를 부르셔요. 첫 사람 아담부터 이 시간 오늘 우리까지 늘 부르셔요.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런데 아담은 그 물음에 실패했습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게 죄인이에요.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부름에 기쁘게 응답하지 못하고 숨으려고 하는 그 모습이 죄인이에요. 그런데 오늘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그래서 엘리 제사장, 엘리 목사님이 가르쳐준대로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게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에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십니까. 그 부름을 늘 들을 수 있어야 돼요. 듣고 있어야 돼요. 다른 걸 물어 볼 필요가 없어요. 사업은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는 거예요. 사람은 오래 살수도 있고 짧은 인생으로 마감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거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의 음성을 오늘 현재 듣고 있느냐, 그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1등 기업의 법칙> 이란 책이 있는데요, 원제목은 <The ultimate question> 궁극적 물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런 내용이에요. 1등 기업이란 어떤 기업이냐. 결국 소비자에게 이것 저것 조사한다고 많이 설문 조사를 하지만 궁극적 물음은 하나라는 거죠. 당신이 쓴 그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수 있느냐? 그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다 기업이에요. 여러분은 다 제 고객이에요. 우리 서로가 다 1인 기업이에요. 내 삶 자체가 수많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기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고 만족을 줘야 돼요. 그게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이에요. 그렇다면 궁극적 물음은 무엇입니까. 그토록 사람들이 목마르게 찾는 것을 줘야 돼요. 하나님이 계시다는데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어떻게 당신에게 말씀하십니까. 그 물음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 당신이 어떤 인생인가 하는 것은 이 물음에 달려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 29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그가 나를 홀로 두지 아니하신다. 이게 가장 멋있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이게 현재 진행형으로 오늘 이해되고 느껴지고 그리고 내 의지를 그 뜻에 따라서 행할 수 있다. 너무 멋있는 사람이에요.

기독교 교육이란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지식적인 요소가 있습니다만 궁극적인 목적은 생명을 나누어 주려는 것이죠. 기독교 교육이 뭐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죠.

가끔 저는 자카르타를 오고 가는 선교사님들을 만나게 되면 참 즐겁게 그 분들을 초청해서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들어요. 왜냐하면 많은 분들이 나름대로 뭔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어떤 사건과 계기가 있었기에 이 땅에 오는 것 이거든요. 듣다 보면 함께 은혜를 받을 때가 많아요. 저는 밥 한 그릇 대접하는 것뿐이지만 너무 좋은 거예요. 저 역시 부름이 있었습니다만 부름 받은 사람의 간증과 고백을 들으므로 내 영이 막 기뻐하는 거예요. 그렇지, 나를 부르신 하나님이 저 사람은 저런 방식으로 불렀구나. 방식은 달라요. 시간과 장소는 달라요. 그러나 본질은 똑같아요. 하나님이 부르셨어요. 그리고 그 부름에 응답했어요.

기독교 교육을 두 가지 물음으로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아담에 물으셨던 하나님이 그 아들 가인에게는 이렇게 물었어요.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네 형제가 어디 있느냐? 가인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실패했어요.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건 두 가지에요.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리고 네 남편은 어디 있느냐, 네 아내는 어디 있느냐, 네 자녀는 어디 있느냐, 네 이웃은 어디 있느냐? 내가 그를 지키는 자입니까? 네가 그를 도와야 한다 라고 말하는 거죠. 받은 바 은혜를 나누는 거예요. 당연히 가족에게부터 먼저 나누는 거죠. 예수님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이런 말씀을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기독교 교육이라는 것은 꼭 교회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다면 기독교 교육을 훌륭히 실천하는 것이죠.

성경을 보면 꼭 지식 있고 나이 든 사람만 하나님의 부름을 듣는 건 아니에요. 모든 연령이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있어요. 남자도 여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노인도 그리고 오늘 사무엘 같은 소년도, 심지어는요 태중에 있는 아이도 부름을 들어요. 그러니 정말 누가 행복한 사람이냐, 인생의 첫출발부터 마지막까지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늘 들으면서 살 수 있다면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에요. 다만 인간 발달과정에 따라서 눈높이가 다 다르겠죠.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는 방식이 다 다르겠죠. 그것을 우리가 유의해 봐야 할 것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엄마 뱃속에서 찬송을 듣고 기도를 들은 사람이에요. 여러분 중에도 그러신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저는 제일 감사하는 것이 그거에요. 제가 저희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기도를 듣고 찬송을 듣고 살았던 거죠.

성경을 보니까 세례 요한이 그 엄마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을 때 이런 사건이 있습니다. 처녀 마리아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서 이제 성령이 네 몸에 역사해서 아이를 낳게 될 것이고 그 아이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는 만민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랍니다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그 뜻대로 하실 것이다. 그랬을 때 마리아가 주님의 낮고 천한 계집종이오니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순종했어요.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에요. 그 자리에는 입을 열어서 순종했어요.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잡할 거예요. 스스로 이해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때 누구를 찾아 갔느냐 하면 나이는 많지만 사촌 관계에 있는 사촌 언니를, 엘리사벳을 찾아 갔어요. 다른 동네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 갔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고민, 누구에게 얘기할 수 없는 이것을 과연 언니는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찾아간 거죠. 그런데 누가복음 1장에 보면 그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 엘리사벳이 말합니다. 그 또한 나이 들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이를 가진 체험을 했기 때문에 마리아를 보는 순간 성령이 역사하셨어요. ,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로 나아오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네가 우리 집에 찾아오는 걸음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기쁠뿐만 아니라 내 뱃속에 있는 아기도 기뻐서 춤추고 있다.

여러분 태아도 멀쩡한 인간이에요. 다 느끼잖아요. 과학이 벌써 다 드러내고 있잖아요. 뱃속에서부터 엄마가 찬송하면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면 그 기도를 다 듣는 거예요. 엄마가 기뻐하면 함께 기뻐하는 거예요. 이 얼마나 중요해요.

그 다음에 아이가 태어나요. 아이가 자라나요. 누가복음 2 40절에 보니까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사실 신앙은 이렇게 어려서 다 결정되는 거예요. 사람의 입맛이 4세 이전에 다 결정된대요. 엄마가 뭘 먹여주는가에 따라서 다 결정되는 거예요. 물론 장가가면 아내의 손아래서 바뀌기는 하지만 어려서 다 결정되는 거예요.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오늘 성경을 보니 아이 사무엘 그랬습니다만 여기서 나오는 아이라는 단어는 엄격히 말하면 소년이라는 말이에요. 사무엘이 어느 정도 컸어요. 아마 초등학생쯤 된 것 같아요. 이 아이를 하나님의 전에 수종 드는 꼬마로 엘리 제사장이 데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늘 교회에서 살았던 거죠. 여러분은 어린 시절 어떻게 보내셨어요. 어린 아이들을 어떡하든지 교회에서 사랑 받으면서 자라나게 해야 돼요. 이때는 아이들이 조금씩 자의식이 크면서 부모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자기가 죽는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부모와 맞바꿀 수 있는 새로운 권위자를 찾아요. 그게 선생님이에요. 그래서 유치원 아이들이 선생님 말이라면 아주 깜빡 죽잖아요. 엄마 말은 안 들어도. 지금 옛 권위에는 도전하고 새로운 권위를 찾는 거예요. 엄마 말보다는 선생님 말이 훨씬 권위가 있어요. 선생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선생님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 애들은 살고 죽어요. 제가 고등학교 교사를 할 때, 학생들 이름을 철저하게 외워요. 일주일에 한 시간밖에 못 들어가는 반이더라도 어떡해서든지 출석부를 놓고 애들의 인상착의와 이름을 많이 기억하고 많이 불러주려고 노력했어요. 많은 꽃이 있어도 그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꽃이 된다 잖아요. 아이들이 살아나더라고요.

어제 J-Kids에서 어린이날 예배를 드렸는데 아주 난리를 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그랬어요. , 잘한다. 그 어린 시절에는 신앙을 무슨 교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교회가 너무 좋다. 이게 중요해요. 어제 처음 온 애가 있었어요. 엄마는 불교라는데 얘가 그랬대요. 나 또 올 거예요. , 그날 선물을 너무 많이 안겨주고 금붕어도 주고 과자도 주고 막 이랬으니까요. 어디 가서 뭘 잘했다고 그런 걸 받아 들고 오겠어요. 사랑과 함께 막 안겨주니까 애가 그랬다는 거예요. 난 또 올 거예요. 아이를 그렇게 만들어야 돼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우리 아버님이 머리를 잘 쓰셨어요. 그때 짜장면이라면 애들 숨 넘어 갑니다. 그런데 꼭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면 점심 먹으러 가자 하고 저희 4남매를 데리고 돈까스 집에 가는데요, 제 기억에 짜장면은 15원이었는데 돈까스는 90원이었어요.  엄청난 사건이에요. 주일만 기다리는 거예요. 좋은 일은 주일에 베풀어 주세요. 야단칠 일이 있어도 주일에는 그냥 넘어 가세요. 오늘은 주일이니까 봐준다 그러세요. 애들도 살길을 열어줘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에게 빚진 마음으로 사는 거죠.

청소년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소년들은 더 이상 부모님에게 의지하려 하지 않아요. 지금은 능력이 없어서 시집살이하는 거지 능력만 있으면 당장 뛰어 나가려고 그래요. 애들을 조사해 보면 부모와의 갈등은 말도 못해요. 요셉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집안이 얼마나 복잡한 집안인지 몰라요. 갈등이 있었어요. 형들로부터 많은 구박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홀로 외로움 가운데 있었죠. 외로우니까 꿈을 꾸는 거예요. 외로우니까 생각이 많은 거예요.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예요. 어른들이야 이렇게 조용히 예배 드리죠. 이제 인생도 한 고비 넘었고 펄쩍 펄쩍 뛸 힘도 없으니까 이렇게 조용히 예배 드리지만 J-Teen들은 달라요. 피가 끓는 애들이에요. 그런 애들을 가만히 앉혀놓고 조용히 예배 드리려고 한다면 글쎄요, 그건 어른 예배 방식이지 애들은 또 다르지 않겠어요. 온몸으로 춤을 추고도 힘이 남아 돌아서 어쩌지 못하는 애들을 어떡하겠어요. 그렇게 만들어 줘야죠. 그런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도록 해 줘야죠.

, 요셉을 보세요. 그런데 너무 재미있어요. 요셉이라는 말은 플러스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남다른 꿈을 주셨어요. 꿈을 플러스해 주셨어요. 그리고 그 꿈이 자기 입에서 술술 고백으로 나올 만큼 되니까 그 다음에는 현실로 바꾸기 위해서 그를 연단하셨어요. 고난을 주셨어요. 남다른 고난을 플러스해 주셨어요. 그 고난 속에서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경제를 배우는 거예요. 왕의 감옥에 들어가서 정치를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때가 되니까 하나님이 세우시는 거예요.

요즘 강남이나 목동 아파트 단지 같은 곳에서는 중간고사쯤 되면 난리가 난대요. 애들을 다잡아서 공부를 시키느라고 엄마들이 마켓에도 잘 안 간데요. 매출이 10% 떨어진대요. 그래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못해먹겠다고 중간고사 경기라고 아예 이름을 부쳤어요. 식당들도 잘 안 된대요. 애들을 데려 오지 않으니까. 그대신 핏자 집은 잘 된대요. 집에서 전화로 배달시키니까.

가끔 한국에 갔을 때 시골을 지나가다 보면 프랭카드 걸린 것을 봅니다. 아무개집 아들 사법고시 합격. 요즘 강남에는 하버드 대학, 스탠포드 대학 동시합격 이렇게 붙었대요. 그러나 의식은 똑같아요. 그거 잘하는 거 아닙니다. 무슨 인간을 기계 찍어내듯 남이 좋다는 학교에 보내려고 하는 그 의식은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정말 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좀 물어 보세요. 정말 아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한번 물어 보세요. 시험과 연단을 다 애들에게서 벗겨주려고 하지 마세요. 애들 죽이는 거예요. 바보 만드는 거예요. 자기 나이에 다 겪어야 될 고민은 다 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 엄마들이 대신 짊어 져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저희 둘째 딸 아이가 지금은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대학 3학년입니다만 예전에 대학교를 가기 전에 고등학교 2학년말에 여기 들어와서 학교를 어디로 가야할런지 모르고 방황하다가 미국에 몇 달 머물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획했던 일이 안돼서 다시 불러들인 적이 있었어요. 아이의 마음이 많이 상했죠. 그러나 그때 저는 딱 한마디 듣고 참 기뻤어요. 그래, 어떻게 지냈니?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이 책을 몇 번 읽었어요.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가서 여러 가지 어려운 시간에 그 책을 읽었대요. 그 책이 쉽지만은 않은데요, 하나님의 은혜가 뭔가를 너무 잘 설명하고 있어요. 그걸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그렇지, 됐다.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시는 방법이에요. 하나님이 늘 일하시지만 그렇게 간절히 필요할 때 듣는 말씀이 그게 아주 약이 되는 거예요. 그게 사람의 생각을 확 바꿔놓는 거예요.

요셉의 환경은 다른 애들에 비하면 마이너스에요. 뒤떨어진 환경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주 어려운 환경이에요. 그러나 그것을 역발상으로 생각할 때 마이너스에다가 다시 마이너스를 곱할 때 플러스가 되듯이. 꼭 우리 자녀들이 다른 자녀들 같이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우울해 하지 마세요. 그건 여러분의 생각이에요. 오히려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으면 돼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면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우리가 결혼을 앞둔 자녀들에게 뭘 주겠습니까. 이삭이 결혼할 때 아브라함은 맹세합니다. 여기 가나안의 딸들을 절대로 이삭의 짝으로 맺어 주지 말아라. 내 고향으로 가서 거기서 그 짝을 찾으라. 우리가 부부로 살아 가면서 함께 하나님을 믿어야 돼요. 아직 그러시지 못한 분들은 또 나름대로 갈등이 있을 거예요. 원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또 두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고 네 사람이 사는 거래요. 각 사람 속에 행복하고 바르게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 수 없도록 되어있는 각자의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사람이 속 안에 또 있는 거예요. 네 사람이 막 엉켜서 사는 거예요. 거기다가 인생의 가치와 목적이 다르고 방향이 다르다면 참 행복하게 살기 어려워요.

우리가 이제는 장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사도행전 18장에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가 나옵니다. 이들이 사업에 크게 실패했어요. 로마 황제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사업체를 다 빼앗겼어요. 그리고 멀리 쫓겨 났어요. 고린도로 쫓겨 났어요. 브리스가는 로마인이고 아굴라는 유대인이에요. 얼마든지 가정이 깨어질 수 있는 그런 요소가 충분한 상황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고린도에 와서 사도 바울을 만나요.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다시 들어요.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해요.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면서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세워 갑니다. 이 일터와 가정과 만남과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뜻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다. 고백을 합니다.

서울에서 중견 건설회사를 운영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얼마 전에 제가 소식을 들었어요. 부도가 났다는 거예요. 그분도 이제는 65세가 넘었을 텐데 인생 말년에 부도가 났구나. 안타까웠어요. 중견회산데 요즘 미분양이 쌓이니까 그만 넘어진 거죠. 아이고,인생의 새로운 고난이 시작됐구나 했어요. 여러분 사업이란 그런 거예요. 남 보기에 멋있게만 되지 않아요. 그러한 어려움까지도 능히 잘 해석하고 견딜 수 있는 믿음의 집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여러분 어떤 노년을 맞고 싶습니까? 저는 성경에 나와있는 이런 노년을 맞고 싶어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안에 있는 그 믿음은 네 외할머니와 네 엄마를 통해서 흘러내린 깨끗한 믿음이다. 제 바람이 있다면 제가 손주를 보거나 손녀를 보거나 나중에 그 아이가 믿음으로 잘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저는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 같아요. 그리고 감사할 것 같아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누구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보라.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다.

성 프랜시스는 젊을 때 방탕한 사람이었어요. 부잣집 아들이었어요. 그러다가 전쟁에 나갔어요. 전쟁의 혹독한 참상을 겪고 병이 들었어요. 다 죽다가 살아났어요. 그 병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어요.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됐어요. 프랜시스의 우화를 아시잖아요. 어느 날 성 프랜시스의 종이 꿈을 꿨는데 꿈 속에서 하늘나라를 갔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는데 그 화려한 영광의 보좌 옆에 빈자리가 있어요. 그래서 물어 봤어요. 저 자리는 누구 자리입니까? 그랬더니 천사가 말합니다. 저기는 나중에 프랜시스가 앉을 자리다. , 내가 모시는 프랜시스가 이런 분이었구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서 프랜시스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이지. 그 말을 들으니까 종이 화가 났어요. 내가 지난 밤에 가서 보니까 자기는 하늘나라에 보좌가 준비되어 있는데, 글쎄 악한 자라니. 누구를 지옥 구덩이에다가 쳐 넣을려구 그러나. 얼마나 화가 나요. 그래서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을 얘기한 거예요. 그러면서 이러고도 가장 악한 자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그랬더니, 프랜시스가 말합니다.  아니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들이 받았다면 그들은 나보다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네.

여러분 우리가 태중에서 예수의 복음을 듣지 못했어요. 뒤늦게 출발하신 분들도 많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평면적인 시간으로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시간은 현재에요. 오늘이에요. 지금이에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에요. 어떤 사람은 그러죠. 어떡해야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나요? 간단해요. 정말 그런 은혜를 받고 싶으세요?  하나님의 말씀, 설교를 열 번만 들어 보세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여러분의 언어가 바뀌고 생각이 바뀝니다. 그리고 믿음의 말이 나오고 그 믿음이 입술로만이 아니라 내 중심에서 나와서 실리게 돼요. 인생이 바뀌게 돼요. 그때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는 거예요.

옛날에 펌프 물 퍼낼 때 어떻게 했어요. 한 바가지의 물(=마중물)[prime the pump]을 준비해놔야 되잖아요. 그 한 바가지의 물을 붓는 자그마한 손길에 펌프의 물이 솟구쳐 나오듯이, 영원한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하나님의 말을 집중해서 들으세요. 그럴 때 우리의 언어가 바뀌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요. 생각이 바뀌게 돼요.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게 돼요. 인생이 변하는 것이죠.

 

기도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늘 은혜를 사모한다고 하지만 한 바가지의 물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불신앙, 불순종을 용서하시고 오늘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 고백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