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729 말씀을 보내시어
성경본문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려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로다 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
(시 107:10-22)
고대 신라 7번째 왕 일성왕은 장수한 인물입니다. 그 연대를 헤아려보면 적어도 100세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신라 3번째 왕 유리왕의 아들 이었습니다만, 유리왕이 죽었을 때에는 너무 어려서 신하들이 의논해서 왕위를 총리였던 석탈해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20여년 탈해가 왕위에 있는 동안 그는 그 아래에서 숨을 죽이며 자라나야 했습니다. 드디어 탈해가 죽었을 때 이제 왕위를 넘겨받을 차례가 되었을 때 이번에는 그만 자기보다 더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파사라고 하는 동생에게 또 왕위를 빼앗기게 됩니다. 마땅히 내게 돌아와야 할 왕위라고 생각했는데 왕위를 빼앗기는 순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함부로 드러낼 수 없어요. 이제는 왕의 형이기 때문에 그 목숨은 칼끝에 매여 있는 거에요. 숨죽이며 은둔하며 삽니다. 견딜 수 없어서 일본으로 망명해요. 그리고 그곳에서 일본여자와 결혼하고 그 곳에서 잊힌 듯이 살아갑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르고 합니다. 세월이 한 30년쯤 지나 파사가 죽고 왕위는 그 아들에게 흘러가는 것이죠. 벌써 여든이 다 되어가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신라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찾으러 왔어요. 웬일인가 했더니 그 죽은 왕이 자식이 없어서 이 다음에 누가 왕위를 계승할까 찾다가 일성에게로 온 것이죠. 80이 다 넘은 나이에 이제 왕이 되어서 귀국을 하게 됩니다. 그 마음 속에 아직 분노가 있어요. 내 80년 인생을 망친 이놈들을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나 돌아가보니 어떻게 됐어요? 다 죽었어요. 그리고 이제 왕으로 20년 재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토록 꿈에 그리던 왕이 되었건만 그의 노년의 20년 왕위는 전쟁과 기근과 질병으로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고통의 날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00여 년 인생을 보내다가 어느 날 그는 숨을 거두게 됩니다.
여러분! 100년 장수하면 뭐하겠습니까? 왕이라고 하는 권력을 가졌다고 행복이 그냥 오는 것은 아니에요. 그의 마음속에 분노와 그 후회와 갈등으로 뒤범벅이 된 인생이라면 100년은 지옥이죠.
그러고 보면 성경의 모세의 이야기와 참 닮았습니다. 모세가 80이 되어서 뒤늦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미디안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셔요. “네 목숨을 노리던 자들은 이미 다 죽었느니라” 모세가 80년 만에 하나님을 만나고 나누는 대화가 출애굽기 3장부터 죽 나옵니다. 참 우리가 다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데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놀라기도 했지만,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말씀하셨을 때, 내가 누구이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세 번씩 이나 말을 못한다고 라고 얘기해요. 우리 그 서재필 박사를 아시잖아요? 그는 나이 스물에 갑신정변 때 국방부 차관이 되는 거에요. 비록 3일천하였지만. 그러나 무너지고 일본으로 망명하고 또 일본사람들이 푸대접하니까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10여년 만에 조선이 또 세상이 뒤집어졌다는 얘기를 듣고 돌아와서 이제까지 자기가 듣고 본 바 미국의 새로운 문물을 우리나라에 보급하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문을 세우고 이런 개화운동을 하지만 또 쫓겨나서 결국 미국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나라가 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인생 다 보내고 80이 넘어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그분은 우리말을 잘 못했다고 해요. 그래서 영어로 말하고 통역을 세워야 했다고 해요. 오랫동안 말을 쓰지 못했으므로, 모세가 나는 말을 못합니다 라는 말은 겸손만은 아니었을 거에요. 분노로 가득 차서 입을 다물고 양치기로 40년 지내는 동안에 다 잊어버린 것이죠. 그래 모세가 말해요 “오! 주님 나는 아닙니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해요.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의 길을 인도하고 너를 가르치리라” 이정도 말하면 들을 만 한데 듣지 않아요. 왜 그러냐? 모세 안에 깊은 분노가 있어요. 날 오늘까지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이 누구요? 도대체 이제 나타나서 나에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요? 라고 하는 거에요.
그 오래 전에 어린아이들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었는데 제목이 이집트 왕자였어요. 모세를 말하는 거에요. 그 참 제목 기가 막혀요. 애굽의 왕자란 말이에요. 도대체 모세가 누굽니까? 그는 유대인 입니까? 아니면 애굽 사람 입니까? 도대체 누가 어머니 입니까? 그는 정체성 혼란에 빠지는 거지요. 유대인인 것 같으면서도 애굽인이요, 유대인의 문화를 아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애굽의 문화 속에 있는 사람이요. 그가 자라나면서 정체성 혼란에 빠지는 것이죠. 그래서 그가 그 나름의 열정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을 때 오히려 그것은 살인을 낳게 되고, 그는 그것으로 인하여 도망가게 되고, 그는 도망자로 실패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 자기의 지난 과거를 생각할 때 분노를 느끼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몇 년을 살았든지 이제 철드는 사람은, 제대로 정신차리고 자기 인생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인생에 대한 분노가 있어요. 병들었을 때 그는 분노가 나타나요. 내가 오늘까지 땀 흘리고 수고했는데 고작 내 손에 쥐어지는 대가가 이것이란 말인가? 분노가 있어요. 모세는 지금 하나님을 향하여 그 분노를 표출하고 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에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이건만 해석되지 않는 자기 엉켜있는 과거에 대한 분노에요. 과거가 해결 되지 않은 사람은 결코 밝은 미래를 기대 할 수 없어요. 다가오는 미래는 한 없이 불안한 거에요. 여러분 오늘 사회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사실은 그런 경제적 어려움을 얘기하자면 우리 부모님 세대는 아예 전쟁 이였어요. 우린 차라리 배부른 거에요. 그런데 오늘의 이런 경제적인 이런 위기가 막 삶의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로 다가오는 사람은, 외적인 환경보다 내적으로 하나도 정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거창한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가장 소중한, 천하 보다 귀한 내 인생에 대한 내 모든 과거와 미래와 오늘이 하나님과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하나하나 실마리가 풀리고 이해 되는 거에요. 이게 해결 되지 않은 사람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고, 그 혼란은 모든 일을 어지럽게 하므로 먹어도 먹는 게 아니고, 넓은 집에 살아도 안정이 없고 불안한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전에 모세와 계속 말씀 하셔요. 모세를 설득하셔요. 모세를 달래기도 하셔요. 때로는 모세를 향해서 화를 내기도 하셔요. 아주 그야말로 모세를 끌어안고 씨름을 하시는 거에요. 하나님이 씨름을 하시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모세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씨름을 하는 겁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모세를 설득합니다. 모세가 이제 하나님 말씀을 조금씩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이 들어오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부르신 그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 계획에 따라가고 참여하면서부터 자기의 과거가 제대로 해석되기 시작해요. 자기의 과거가 이해됨으로 말미암아 이제 미래를 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요. 여기에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소명이 있고 맡기신 사명이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이라고 하는 그 계명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방편이요, 그것은 내 삶의 기준이 되는 거에요.
여러분, 신앙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거에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거에요. 그리고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거에요.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한발한발 순종하면서 점점 더 밝게 깨닫게 되는 거에요. 나중에는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향해 주신 그 놀라운 사랑과 계획에 감격하면서 기쁨으로 내 삶을 열고 따라가는 거에요. 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모세와 나누었던 그 하나님의 말씀. 오늘 우리도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본문 말씀을 보니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어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법은 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을 고치실수 있어요. 전쟁의 위기 속에 죽음의 위기 속에서 알길 없는 그 놀라운 은총으로 구원 하실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사건까지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해석되고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소명으로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으로 이해되어야 그 은총의 사건이 은총이 되는 것이죠.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죠.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여러분 십자가는 양면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는 심판이에요.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십자가에 죽는 거에요. 그는 곧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보시는 눈이에요. 무지하고 무능해요. 내 인생이건만 제대로 갈 길도 알지 못하고, 제대로 행복한 인생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거에요. 죄와 허물에 매여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세상 살면서 부딪히고, 깨지고, 멍들고 나중에는 병들어 죽음의 문턱에 선 인생이 된다 라고 하는 거에요. 이게 십자가가 우리 인생을 향하여 보여주는 거에요.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죽음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놀랍게도 이 십자가는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오늘 본문에 말하듯이 이것은 놋대문 이요, 쇠로 만든 빗장 같아서 우리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데,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해결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그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해결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구속함을 받았다 이런 단어를 써요. 구속한다는 말은 종으로 팔려간 사람을 돈을 주고 값을 치르고 그를 되사 가지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 이게 바로 구속이에요. 값을 치르고 저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는 것을 구속이라고 그래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구원의 사건을 이루셨기에 또는 대속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은 사랑 받은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데 고통이 있어요. 고통은 우리 현실이 어려워서 고통이 아니에요. 제가 어떤 소설 논픽션 소설을 읽는데 ‘대륙의 딸’. 중국에 말이에요 지난 한 100여 년 중국역사가 어땠습니까? 그래 제가 조금 읽기 시작했는데 참 드라마틱해요. 여인3대. 제 나이 비슷한 사람이에요. 중국 공산주의 시절을 겪은 사람이에요. 홍위병으로 앞장서서 철부지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에요. 그 엄마는 공산당원이에요. 그 할머니는 옛날 청조 말기에 장군의 첩이었던, 그야말로 그 집안에 흘러내리는 그 파란만장한 여인들의 역사를 기록한 거에요. 이 만한 시대가 없어요. 지금 이렇게 편안히 앉아서 예배 드리는 이런 나날들이 역사 속에 그리 흔치 않아요. 우린 너무너무 복에 겨워 있는 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그 무지가 고통의 원인이에요. 무지가 고난이에요. 길을 아는 사람은 걱정 하지 않아요. 의연하게 나갈 뿐이에요. 길을 모르기에 그게 두려움이 되고, 공포가 되고, 어려움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고난을 주셨다 했어요. 그 고통 때문에 우리는 막 부르짖어요. 그 고통으로 인해서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깨트리고, 낮아져서 하나님의 구원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사망과 흑암의 그늘 속에서 우리를 건지시며 동시에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는 거죠.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드디어 찬양하게 하셔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 인생에게 베푸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주를 찬양한다.
사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빚이 많아요. 우리 앞선 세대에 큰 빚을 졌어요. 오늘날 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삶 속에, 이런 문화 속에 복음을 전하려면 이 문화를 통하지 않고는 안되죠. 그래서 제가 예전에 서울에 있을 때에 그 초등학교2학년 아이들 예배에 축도를 늘 갔었는데, 선생님들과 함께 애들이 찬송을 안 부르는 거에요. 아니 왜 이렇게 찬송을 안 부를까? 그러다가 여름성경학교를 할 때 다시 가서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여름성경학교는 좀 특별하게 한다고 선생님들이 이것 저것 준비하면서 그때에 소위 유행하던 랩을 이용해서, 랩에다가 가사를 붙여가지고 애들을 가르쳤더니, 애들이 말이에요, 한 아이도 제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가 없어요. 다 일어나가지고 몸을 흔들면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뭐 형제를 사랑하라고 춤을 추는 거에요. 그때 제가 아차 실수 했구나. 어린아이 찬송가에 실려있는 150년 전 미국의 무디 부흥운동 때 일어났던 그 노래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이걸 익히라 했으니, 애들이 어려서부터 TV에서 나오는 곡조와 다른 이 옛날 찬송가가 어떻게 몸에 베여 들겠어요? 우리가 문화를 너무 몰랐던 것이죠. 복음을 위해서 문화를 활용해야 되죠. 거기에다가 말씀을 덧입혀가지고 가르쳤을 때에 아이들이 그 노래와 그 가사를 몸으로 받아들이고 춤추더란 말이에요. 문화는 중요하죠.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여러 가지 교인들을 기쁘게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합니다. 다 필요하지만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어요.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있는 게 아니에요. 잘 먹여가지고, 귀를 즐겁게 하므로 그런 어떤 성공신화에 매달려 있는 세상과 똑 같은 그런 이데올로기가 들어와서는 안돼요. 하나님 만나는 곳이에요. 내 인생의 고난 속에서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만나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화해를 통해서 내 자신과 화해하고, 나의 과거와 화해하고, 나의 미래와도 화해하고, 내 사랑하는 아내와도 화해하고, 남편과도 화해하고, 내게 주시는 모든 일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하나 해석해 나가는 것이죠. 이게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거룩함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를 만났을 때에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가 신은 벗었습니다만, 마음에서 더러운 신은 벗지 못했어요. 말씀을 통해서 하나하나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쫓게 되었던 것이죠.
우리 한 세대 전에 그 일제 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고난 그 자체였죠. 그 우리가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서 목숨을 걸고 저항하다가 순교한 분으로 주기철 목사님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 보수신앙에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근데 최근에 저는 다시 한번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윤동주 시인을 다시 한번 주목하게 됩니다. 그는 1917년생이고 45년 2월에 스물여덟의 나이로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의혹의 죽음을 당했어요. 그 기록을 보면 그는 자연사 한 건 아니에요. 생체 실험의 그런 대상으로 죽지 않았는가 그런 의혹을 가지고 있어요. 그는 저 함경북도 저 끝에 살다가 그 집안이 다 간도로 건너가죠. 독립운동 하기 위해서,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지금 저 용정 근처에 명동촌 이라고 하는 곳에 집안이 다 옮겨가서 그곳에서 한인들의 민족운동과 우리의 신앙의 자유를 이루는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데 거기에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는 평양 숭실중학교를 나오고 연희전문문과에서 공부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었어요. 사실은 그들의 신앙의 배경은 한국의 전통적인 보수신앙과는 좀 다른 상당히 자유로운 신앙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고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윤동주는 살아생전에 시집을 한번 내지 못했어요. 우리가 잘 아는 그 시는 다 죽은 다음에 그를 기억하기 위해서 펼쳐 낸 시죠. 여러분 아시는 시, 너무나 잘 아는 시를 읊고 싶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고 하는 사후에 발간 된 그의 시집에 ‘서시’ 를 우리가 잘 압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시는 신앙을 하는 사람이나, 하지 않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어른들에게도 아주 가장 순수한 그런 하나의 고백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삶의 전기를 읽어보고 일대기를 읽어보면 그 밑바닥에는 펑펑 터져 나오는 십자가의 은총이 있어요. 그가 고난을 당하면서 쓴 시 가운데 ‘십자가’ 라는 시가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시를 하나 올려주시죠. 제가 읽겠습니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는 그 짧은 스물여덟의 짧은 인생,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그날까지 일본의 식민지배와 억압과 그 내리 누르는 그 고통 속에서 한 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그러나 그것을 자기에게 주신 시대의 십자가로 받아 들이고 믿음으로 그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간 사람이죠.
오늘 우리의 교회, 우리의 신앙은 우리 앞선 세대에 이런 고통과 고난과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살았던 보수적 신앙 또는 진보적 신앙 이런 많은 사람들의 그 뿌린 터 위에 오늘이 있는 것이죠.
그럼 우리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렇게 풍요를 누리면서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저는 앞선 시대에 이런 시대적인 아픔과 고통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했던 그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 마음의 빚을 너무나 무겁게 느끼지 않을 수 없어요. 나는 어떻게 이렇게 밝은 세상에 태어났을까? 오늘 여기 이러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내가 가야 할 인생의 걸음은 어디이고 오늘 우리교회와 우리한국교회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시대적인 환경 속에 마땅히 붙들고 나아가야 할 시대적인 사명은 무엇인가? 좁게 말한다면 우리는 이곳에 있는 한인공동체에 하나님을 정결한 모습으로 섬기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어야 할 시대적인 책임을 우린 가지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비즈니스 하는 거고, 그것 때문에 여기 사는 거에요. 그렇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그러져 있는 거에요. 그게 해석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 자체가 고통이에요. 여러분 나의 연약함과 죄로 인한 고통,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어요. 그리고 예수를 믿고 한 없는 하나님의 그 사랑 가운데 모든 것을 용서받고 새롭게 태어난 자유인으로서 우리에게는 이제 우리가 시대적인 고난을, 시대적인 사명과 책임을 짊어지고 나가야 할 그런 하나님의 뜻이 있어요. 이건 고난도 아니에요. 이건 행복이에요. 어제 박태환 선수 어떻게 되었어요? 난 실격한 줄 알았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파요. 4년을 그 고생을 했는데, 실격을 했으니, 그래서 아침에 혹시나 하고 열어봤더니 은메달로 바뀌었더군요. 여러분, 대표선수의 어려움이 있잖아요. 그러나 그건 영광이에요. 그가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그건 우리모두의 기억 속에 남는 그의 삶의 아름다운 자취가 되는 거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결과를 얘기하지 마세요. 오늘 하나님과 함께 그 마음을 드리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미 복된 사람이에요. 이미 승리한 사람이에요. 우리 앞에 다가와있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상들의 어려움은 그건 어려움도 아니에요. 어려움은 늘 내 안에 있어요. 어떤 분이 그런 다잖아요. 전쟁을 겪은 분들이 늘 하는 말 ‘뭐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건 일도 아니야 우린 전쟁도 겪었어’. 여러분 해봐야 죽기뿐, 더 하겠어요. 그런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대적인 부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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