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십자가의 의미[내죽을날을모르는거야말로하나님의가장큰축복임]/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10:40

080321 십자가의 의미 (27:45-54)

성경본문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저는 ‘인간극장’이라는 프로를 즐겨 봅니다. 뭐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지요. 그러다가 코끝이 찡할 때가 있는데 뭐 요란한 사건이 있을 때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엄마와 딸 사이에 주고받는 말 한마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말 한마디, 그런 말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가 많아요. 왜 그렇지요? 저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마음이 통한 것이지요.

그런 거에 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자칫 우리에게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건이에요. 시간적으로는 이 천년 전 사건이요, 공간적으로는 이 땅이 아닌 저 땅의 사건이에요. 그리고 십자가라고 하는 오늘에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그러한 방식, 익숙하지 않아요. 공감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남의 일인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몸에 갇혀있고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는 우리의 한계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어떻게 그 사건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건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느냐. 그래서 우리 삶에 고난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못 참거든요. 원통하거든요. 그제야 주님의 고난을 조금 이해할 수 있어요. 사실은 주님의 고난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죽음 앞에 내몰려야 돼요. 그때에야 ‘아, 그렇구나.’하게 될 것이지요. 그 어떤 것으로도 죽음을 막을 수 없는 그 상황, 그 자리에 가서야 ‘주님’하고 부르게 되겠지요.

인도네시아에 사시는 분들에게 몇 년 사셨습니까. 그러면 10, 15, 20, 많이들 사셨어요. 그런데 흔히 이런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처음에 한 3년 살려고 왔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한 3, 인도네시아에서 3년은 휙 하고 지나갑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병이 들어서 당신은 앞으로 3년 밖에 살 수 없다,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여러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남은 3년 동안 무슨 일을 하며 사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예수님이 나이 서른에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셨어요. 누가복음 3 23절에 보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실 때 나이가 30세 쯤 되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그 공생애 3년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3년이었어요. 예수님은 더 사실 수도 있었지만 서른셋으로 인생을 마감했어요. 그래 서른셋이 넘으신 분들은 덤으로 사는 거예요. 더 바랄 것도 없어요. 오늘 밤에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도 할 말이 없어요. 이미 살 만큼 넉넉히 살았기 때문이에요. 삶이 무엇인지 알 만큼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공생애 3년 사실상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 3년 동안 무엇을 하셨는가. 그가 발견한 것은 세상의 죄악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 30년 동안 가정을 돌보며 살면서 가난을 진저리 치도록 경험한 거예요. 오늘날도 가난이 무섭지만 그 시대에 더 했죠. 또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요셉은 일찍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이 되어서 어머니와 또 많은 동생들, 어떤 분은 그래요, 예수님도 동생이 있었어요? 성경을 읽어 보세요. 그 동생들 이름이 주루룩 나와요.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얻은 동생들이겠지요. 그들을 책임지고 목수로서 일을 해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 장면이 바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모습이에요.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회개의 세례를 증거할 때에 많은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도 나아가서 세례를 받았어요. 육신을 입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므로 세례를 받으셨어요. 그런데 세례 받으실 때에 예수님의 눈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자, 여기 ‘하나님 되신 예수님’ 그런 고백이 있어요. 우리의 신앙고백이에요. 그러나 또 하나 그 대칭점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 우리와 같이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인간 예수의 모습이 있어요. 특별히 젊은이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있어요. 그런데 세례 받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어요. 성령께 이끌려 광야로 나갑니다. 광야란 우리의 삶을 상징하는 곳이에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듯하나 한세상 살아보면 다 헛것이에요. 그저 휘몰아치는 바람에 다 스러져버리는 것 같은 세상이에요. 광야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광야에 갔을 때 거기에 사단이 있었어요.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합니다.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은 우리가 인생 광야를 살아 갈 때에 당하게 되는 시험의 본질적인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 번째는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어떡하든지 세상 살면서 남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때로는 죄를 범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아요. 죄의 구체적 실상이에요. 그 돈 버는 것 때문에 거짓말도 하고 남을 속이기도 하고 돈 때문에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고 심지어는 남편과 아내를 죽이는 그런 일들까지도 있습니다. 또 하나 두 번째 시험, ‘저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보아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를 붙들어 주실 것이다. 이적을 베풀어라.’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내 삶에 남다른 이적이 있기를 원해요. 기적이 있기를 원해요. 자기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해요. 이것 또한 죄의 실상이에요. 하나님을 위해 살려 하지 아니하고 나를 위해 우주가 돌고 나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고 나만을 위하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 그게 죄의 근본이지요. 세 번째 시험은 사단이 요구하지요. ‘내게 경배하라. 그러면 온 천하만물과 이 모든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자 이러한 세 가지 시험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죄악의 구체적인 실상들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도우십니다. 시험 받는 그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떡을 돌로 만들어 먹어라’ 하는 그 시험에 대해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여러분 떡도 필요하지만 일용할 양식도 필요하지만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일용할 은혜도 필요하지요. 두 가지를 다 받아야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두 번째 시험 ‘성전에서 떨어져 보아라. 그리고 이적을 행하라’ 하는 그 유혹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명령이 나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뜻인 줄 알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 복된 인생이에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기적과 성공을 찾지 마세요. 하나님이 주시면 어려운 일이든 기쁜 일이든 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사단을 경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경배하라.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의 유혹과 시험에 부딪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해결책이에요. , 인간의 문제는 죄에요. 이 근본문제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 가정 안에 기업 안에 만남과 만남 속에 늘 자리하고 있는 거지요.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이냐. 예수님이 발견한 것은 내 남은 3년 동안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바로 인간의 죄의 문제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거죠. 보여 주신 거죠. 거기에 남다르게 도전 받게 하신 거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를 궁리하게 된 거죠.

우리가 이 세상을 70년을 살기도 하고 간혹 어떤 분들은 100세를 살기도 하고 모차르트 같은 사람은 그저 30여세 살다가 죽었죠. 어떤 예술가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음악이 남겨져 있어요.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걸 기억하고 듣고 있어요. 거기에 심취한 사람들은 그를 기억해요. 예술이든 문학이든 과학이든 철학이든 그것으로 인해서 그들의 이름이 남겨져 있어요. 그런 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다시 연구하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순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붙들었던 죄의 문제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인생이라면 누구나 다 일상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에요.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젊은 예수에게 세례를 통하여 광야의 유혹을 통하여 인생의 근본 되는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발견하게 하셨고 이 문제를 내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게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십니다.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라.’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들은 바 말씀을 증거하기에 그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권세 있는 말씀이 됐어요. 병자의 병을 고치는 능력의 말씀이 됐어요. 사람들의 생각과 육체 속에서 그들을 괴롭히던 귀신을 내쫓는 말씀이 됐어요. 그 말씀을 좇고자 하는 제자들을 부르셨어요. 예수님의 사역이 넓어질수록 위기가 옵니다. 벌써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셨을 때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자들이 궁리합니다. 도대체 저를 어떻게 할까, 기존의 신앙과 종교질서를 송두리째 뒤집어 엎고 있는 저 젊은 사람을 어떻게 할까, 죽이기로 하는 거죠. 예수님보다 앞서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던 세례 요한이 헤롯왕에게 붙들려서 아주 비참하게 죽습니다. 그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에게 전하게 됩니다. ‘예수님 피하십시오. 헤롯이 당신도 죽이려고 한답니다.’ 누가복음 13 3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말하라.’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어요. 간악한 여우라고 불렀어요. ‘나는 오늘 내일 모레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리라.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 같이 나 역시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이다.’ 자기 죽음을 예감하셨어요. 이제는 자기 차례라고 하는 것을 아셨어요. 그리고 깊이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죄의 문제가 있어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요. 그런데 이제 마지막 결정적인 문제가 남았어요. 마치 구약에서 죄를 범한 사람이 양이나 염소를 끌고 가서 자기의 죄를 고하고 그 죄가 양과 염소에게 옮겨진 다음에 그 목을 쳐서 각을 뜨고 피를 뿌리고 그것을 다 불살라 버리므로 죄의 사함을 받듯이, 저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희생 제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죠.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그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바요나 시몬아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네 아버지도 아니고 어떤 인간의 스승도 아니고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네게 오늘 이 비밀을 보여주셨구나.’ 예수님이 자기가 메시야이고 그리스도이심을 제자들 앞에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하는 그 순간 바로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이제 내가 너희들의 메시야요, 그리스도가 되었으니 내가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다.’ 제자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는 옛날의 다윗 왕과 같이 로마를 쫓아내고 모든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다 해소하고 강한 나라를 만들고 온 세계를 지배하는 그런 나라, 그런 왕을 기대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메시아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메시아, 제자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메시야였기에 메시야이심을 선포하는 그 순간부터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고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깜짝 놀라서 ‘주님 어떻게 당신에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주님을 붙들 때 주님이 말씀하시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여러분 신앙고백을 했는데 그 틈에도 사단이 역사하고 있어요. 신앙고백은 했습니다만 정말 그 마음 속에 제대로 알고 신앙고백 하는 것인가, 자기의 욕심을 따라, 자기의 상황판단을 따라 이야기 한다면 순간순간 사단이 역사해요. 우리는 귀신에게 붙들려 가지고 몸무림치는 사람만 귀신들렸다고 얘기하지만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내 좁은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논하려 하는 것만큼 사단이 강하게 역사하는 시간이 없어요.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셔요. 마가복음 10 45절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을 위한 희생 제물로 내어 놓기 위하여 온 것이라.’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감동이 있었어요. 광야 시험을 통하여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발견했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선포했더니 귀신이 물러가고 병자가 일어났어요. 제가 보기에 제자들도 깜짝 놀랐지만 여러분 혹시 그런 생각 안 해 보셨어요? 예수님도 놀래셨을 것 같아요. 적어도 처음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을 감동으로 전했더니 변화가 일어났어요. 권세 있는 말씀이 되었어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도 놀라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감동을 주셔서 그리스도요, 메시야이심을 고백하게 합니다. 그걸 예수님이 듣습니다. 그것을 듣는 순간 ‘아, 이제 내가 죽어야 할 때로구나, 이제 하나님이 부르시는구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면 지지자들도 기뻐서 날뛰지요. 여러 가지 동기가 있겠지요. 자기가 지지한 후보가 당선됐으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러나 그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야 드디어 내 인생도 볕들 날이 왔구나.’ 그러나 정작 대통령 당사자는 아주 생각이 착잡할 겁니다. 기쁘기도 하지만 그 무게감에 때로는 잠을 못 이루는 일도 있을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출발은 화려하지만 현실은 얼마나 냉혹한지, 경제 위기가 오고 있지 않아요. 그러면 이것을 잘 해결하지 못하면 어디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든지 최종적인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것 아니겠어요. 아마 예수님도 메시야 고백이 제자들에게서 나오는 순간, 저들이 알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알려 주시고 그것을 듣게 하시는 순간 ‘아, 이제는 내가 죽어야 할 때가 왔구나. 하나님이 이것을 드러내시는 구나.’ 그래서 이제 고난 주간을 맞은 거예요.

여러분 오늘이 벌써 성 금요일이지요. 지난 주일 우리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왕을 맞았습니다. 월요일에는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셔서 타락한 성전을 다 뒤집어 엎으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성전을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미친 얘기 아니에요? 이 성전이 옛날 헤롯 왕부터 시작해서 46년째 지어지고 있는 성전인데 어떻게 이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신 말씀이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화요일에 예수님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수많은 말씀들을 증거하시면서 논쟁을 일으켜요. 사사건건 부딪히는 말씀만 하셔요. 무슨 의도예요? 나 죽여라 이거예요. 내가 이번 고난 주간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러 왔으니 나를 죽여라 하나님의 시간표에요. 그래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여러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 같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 움직이는 거예요. 의도된 자살이에요. 하나님을 믿으라 .믿음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어서 어리석게도 농부들이 포도원 주인 아들을 죽이면 그 과수원이 자기 차지가 될 줄로 알고 아들을 죽였다. 십자가 죽음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에요. 그리고 부활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종말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깨어 있으라. 언제 그날이 올는지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 말씀하셔요. 수요일입니다. 수요일에는 베다니에서 조용히 하루를 머무시는데 그날 저녁 식사할 때에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그 향유를 붓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저 비싼 향유를 저렇게 붓다니 왜 낭비를 하는가’ 할 때에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이 여인을 괴롭게 하지 말아라 이 여인은 지금 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다.’ 시체에 향유를 붓듯이 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감동으로 지금 내게 와서 기름을 붓는 것은 내가 이제 곧 십자가에 죽을 것을 예비하는 것이다, 말씀하셔요. 목요일이 되었어요. 목요일 저녁에 유월절 만찬을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나눕니다. 떡을 떼어 줍니다. 잔을 나누어 줍니다. ‘이것을 받아먹고 마셔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는 내 몸이요 흘린 내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의 의미는 이거지요. 주님이 나를 위해 그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셨다. 그의 십자가는 곧 나를 위한 사건이다.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떡과 피를 나누어 주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이심을 드러내셨어요. 드디어 금요일입니다. 이제 붙들려 가셔서 빌라도의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요.

오늘 십자가에서 두 가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낮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천지가 어둠에 갇혀있는 그 마지막 시간에 주님이 고통의 외마디를 외치시지요. ‘ 엘리엘리 라마 사막다니’ 시편 21 1절 말씀을 인용하신 거예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는 모든 죄인들의 마지막 울부짖음이에요. 죄인을 위하여 대신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외면하는 죄인의 마지막 모습을 고통 속에 외치셔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그 순간에 성전에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두 쪽으로 찢어집니다. 그 지성소에는 아무도 들어 갈 수 없어요. 일 년에 단 한번 제사장만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나 그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므로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지요. 여러분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삶에는 고통이 있고 고난이 있어요. 그리고 그 고통과 고난의 극치적 표현이 죽음이에요. 억울한 사람도, 부자도, 학식이 뛰어난 사람도, 예쁜 사람도 죽어야 돼요. 죽음은 피할 수 없어요. 인간의 모든 아픔과 눈물은 다 죽음으로 수렴되는 거예요. 인생은 그 죽음을 두려워해요. 그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생 배후에 사단이 역사해요. 그래서 빗나가게 해요. 죽음을 맛보지 않으려는 거지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이제는 나의 죄를 해결하셨어요. 죽어도 부활의 약속이 있어요. 생명이 있어요. 이제는 그 비밀을 알고 살아가는 자에게 영원한 소망이 있는 것이지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 사랑하는 딸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음성을 듣고 사는 것이지요.

그 ‘시골의사’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박경철’이라고 하는 의사가 있습니다. 그가 쓴 책이 있습니다.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묶었습니다. <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 거기 많은 에피소드가 있어요. 그 중의 한 이야기입니다. 15년 전에 한 40대 후반의 여인이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상태를 들어보니 너무 심각해요. 수술을 하려고 열었는데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다 퍼져버렸어요. 그래서 그대로 덮었어요.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 두 달 동안 그 병실에서는 늘 찬송이 울려 나와요. 말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조용히 찬송을 따라 부릅니다. 암 환자들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진통제를 맞는데 그는 거부합니다. ‘내버려두세요. 이걸 맞으면 잠깐 고통은 잊지만 내 영혼이 몽롱하게 취하는 것은 원하지 않아요. 내 영혼이 깨어 가지고 찬송 부르길 원해요.’ 두 달을 내내 찬송을 부르다가 임종을 맞습니다. 그에게는 고등학교 학생 아들이 있었고 또 중학생 딸이 있고 또 알고 보니 남편은 이미 훨씬 젊어서 먼저 세상을 떠났어요. 임종하는 자리에서 아들이 눈물을 떨어뜨리며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엄마, 잘가요. 엄마 참 애썼어요. 이제 우리가 이만큼 컸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가세요. 먼저 가서 아빠를 만나고 아빠를 보살펴 주세요. 엄마 정말 고마웠어요. 엄마 사랑해요.’ 그리고 이별해요. 그 아름다운 이별을 잊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리고 15년 후에 어느 날 자기 병실에 어떤 젊은 30대 초반의 신부님이 찾아 온 거예요. 어디서 본 듯도 한데 알고 보니 그때 그 학생이었던 거예요.

여러분 믿는 자의 축복은 죽음마저도 평안하게 소망을 가지고 믿음의 말을 나누면서 헤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축복이 있어요. 우리의 죽음이 그러한 것을 알기에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면서 오늘을 사는 거예요. 내 죽을 날을 모르는 거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이에요.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사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일상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거예요. 죽음의 비밀을 알고 그 날도 주님께 맡기고 오늘 이 소중한 일터와 가족과 평범한 일상을 감사하고 찬송하고 감격하며 사는 거예요. 때로는 말 못할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시간에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는 거예요. 그가 먼저 나를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기에 오늘 나는 죽는 자리에서도 소망이 있고 또 어떤 말 못할 어려움과 안타까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가 있다고 하는 것이에요. 이것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주님의 고난을 진정으로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기도

하나님, 오늘도 지구가 돌고 온 우주가 돌고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귀는 그 어마어마한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듯이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은 온 우주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건이기에 자기 일상에 매이고 자기 관심에만 매여 있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고 깨달을 수 없는 말씀이었으나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펼쳐 주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이 놀라운 은총을 감사하며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죽는 날을 비밀로 감추어 두시고 이토록 평범한 일상을 주셔서 가족과 더불어 사랑하며 살게 하시고 일터에서 땀 흘려 수고하며 살게 하시고 때때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주님을 의지하며 주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며 새로운 소망을 얻게 하신 주님, 사나 죽으나 주님을 온전히 기억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