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진목사/미디안의 모세 (출 2:15-22)
새생활론
요 약
모세와 십보라와의 관계는 솔로몬과 술람미에서 보듯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 된 성도의 예표이다. 이드로의 딸들이 모세를 우물가에서 만났듯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 말씀과 성경에서 만난다. 딸들의 양에게 물을 먹임을 방해하는 포악한 목자들은 죄악된 육신적인 마음이요, 모세의 도움은 곧 교회와 성령의 은사의 상징이다. 그들은 모세의 도움을 받고 그를 영접하고 딸까지 주었듯 은사와 교회생활에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을 주로 삼아 구원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해야 한다.
설 명
<모세와 십보라>
⇒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예표한다.
1. 예수님을 만나는 법
15절 "우물곁에 앉았더라"
☆ 우물의 신령한 의미 ☆
① 하나님의 말씀 (롬10:8), ② 교회 (엡1:23)
→ 그러므로 말씀과 교회를 가까이 하라.
2. 은사의 도움
17절 "그들을 도와 그 양 무리에게 먹이니라"
☆ 일곱 딸과 목자 ☆
① 일곱 딸 = 영성, ② 목자 = 육신적인 마음
→ 은사의 도움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라.
3. 신앙의 목적
21절에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 모세를 위하여 ☆
대접, 동거, 딸 줌 = 하나님 사랑 상징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
(본 문)
2: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2: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 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2: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무리에게 먹이니라 2:18 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2:19 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무리에게 먹였나이다 2:20 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 2: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강 해)
지난 시간에는 모세가 히브리인이라는 자의식이 생겨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포기하고 자기 백성을 돕다가 실패하고 애굽에서 도망치게 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말씀 속에서 양육을 받을 때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의식이 생겨나야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살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미디안의 모세라는 제목입니다. 미디안으로 도망친 모세는 그 곳에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미디안의 모세는 우물곁에 머물다가 양에게 물을 먹이는 제사장의 딸들을 돕다가 그것을 연유로 해서 그 집에 거하게 되고 그 딸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영적 비유 관점에서 보면 솔로몬과 술람미의 관계와 같이 돕다가 되어졌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와 성도의 예표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런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들은 모세를 어디에서 만났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15절에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 "하루는" 이라는 용어 속에 모세가 얼마나 바로 왕을 피해 미디안 땅을 다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미디안은 그두라에게서 난 아브라함의 아들 미디안의 자손으로 일명 베드윈족이라 하여 양을 치며 유랑 생활을 하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온 나라 들판이 온통 짐승들과 목자들이고 옮겨다니기 때문에 피하기 좋았습니다.
모세의 이 땅의 삶을 성경은 나그네 생활이라 했습니다. 행7:29에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했습니다. 그가 첫 아들을 낳고 게르솜이라 했는데 그 뜻 역시 '거기 나그네가 됨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보아 미디안은 이 세상 나그네길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 나그네길 여기서 애굽 바로왕을 온전히 피한 미디안 사람이라면 누굽니까? 더구나 모세의 사명을 참고해 볼 때 누굽니까? 이는 죄 없으시지만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우물곁에 앉았더라"에서 우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교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찾아 오셨으되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하나님 말씀과 교회를 통하여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말씀 영접이 예수 영접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롬10:8에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했습니다.
또 왜 교회에 와야 예수님을 만납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엘림 오아시스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 엘림이 교회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예수님 만나지 못했다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으라는 말씀을 영접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 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를 만납니다.
2. 양 물 먹이려는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어떻게 모세의 도움을 받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사의 도우심을 발견합니다.
16-17절에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 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무리에게 먹이니라" 했습니다.
여기 미디안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겐족속이라 하여 이방 속에 흩어져 살지만 하나님을 경건히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모세 장인의 이름이 여기서는 루우엘이라 나와 있는데 그 뜻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그 뜻으로 보아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섬기며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다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지요?(약2:21-23)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언젠가 겐족속에 대해서 말씀 드렸듯이 이들은 이스라엘을 부끄럽힐 만큼 믿음으로만 살아간 신앙의 족속입니다.
그런데 르우엘에게 일곱 딸이 있었습니다. 7은 완전수요, 딸은 대개 영혼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흔히 거듭난 영혼의 상징입니다. 욥의 아름다웠던 일곱 딸 역시 영성을 입은 거듭난 영혼의 상징임과 같습니다. 이 거듭난 영혼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방해꾼이 있습니다. 17절에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다른 목장의 이 목자들이 얼마나 포악한지 항상 자기들이 먼저 먹이겠다고 먹이고 있는 어린 여자들의 양을 쫓았습니다. 이 목자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쓰인 목자의 용례를 보면 겔34:2에는 자기만 먹이는 목자라, 유1:12에도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라 했습니다. 이 자기 몸만 먹이는 목자가 무엇입니까? 육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육신적인 마음입니다. 이 육신적인 마음은 언제나 신령한 믿음을 갖지 못하도록 흩어버립니다. 이 방해꾼 때문에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우물은 당시 최고의 보배요 축복인데 이처럼 육신적인 마음은 은혜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지금도 방해꾼 노릇을 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큰 방해꾼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는 사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마침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그 포학자들을 쫓아내고 양 무리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항상 포악한 목자들 때문에 그렇지 못하는데 일찍 물을 먹이고 오는 딸들을 보고 아버지 루우엘은 놀라서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한 애굽 사람이 도와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육신적인 방해꾼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의 도움을 받으면 아버지 루우엘이 깜짝 놀라는 것처럼 보다 신속한 영적인 성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한 애굽 사람이라고 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옷 입은 대로 말했겠지만 이처럼 성령의 은사는 우리 육신이 깨달을 수 있도록 그런 형태로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은사는 주의 종들이요 또 지체된 성도들이요 또 나에게 임한 신령한 여러 가지 은사들입니다.
우리가 이 은사의 도움을 입을 때 신앙은 신속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을 해야 신앙이 쉽습니다. 스스로 성경을 깨달아 믿음 가지려면 실패하고 실패하다가 일생 수고해도 못합니다. 또 성도들의 도움 받아 늘 기도해 주니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도움 주의 종들의 도움 지체의 도움 그리고 성령 은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셔서 육신적인 악한 목자에게서 건짐 받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쉽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또 다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모세의 도움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 모세를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했고 또 모세가 원하는 대로 함께 동거하고 모세가 기뻐하자 딸까지 아내로 삼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21-22절에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을 은사의 주님으로만 국한시켜 도움만 받으면 주님을 이용하는 것밖에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자기 신앙을 돕는 영의 환경이 아무리 좋고 은사가 충만함도 좋지만 그것에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은사고 직분이고 그것이 우리를 돕긴 하지만 그 자체가 구원과 생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그 집에서 거함을 기뻐하고 나아가 큰 딸 십보라와 동거하기를 기뻐함과 같이 우리는 그 은사를 통하여 우리 주님을 모시고 더욱 신앙생활 잘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은사 주심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그 은사만 이용하고 말면 발등을 찍을 날이 옵니다.
마7:22-23에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즉 직분도 좋고 능력도 좋고 은사도 좋고 축복도 좋지만 내 영혼이 예수 믿고 내 삶이 말씀으로 변화되지 않고는 빈 쭉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을 잘 아시기 바랍니다. 그 은사의 도움을 입어 예수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고 그를 사랑하며 그와 함께 살도록 하심입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새"라는 뜻입니다. 마치 새가 둥지를 틈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 미디안 광야에서 살아가면서 더 이상 방황하지 마시고 예수님 모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원한 행복과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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