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말씀이 사람이 되어[낮은데로임하소서=안요한목사실화,LOGOS]/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14:59

071223 말씀이 사람이 되어 ( 1:9~14)

성경본문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청준씨의 소설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 그 주인공은 안요한 목사입니다. 그는 가난한 목사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세대 전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너무 가난했어요. 특별히 그 아버지인 안진삼 목사는 젊을 때 아주 부를 누린 사람이었어요. 그러다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 모든 재산을 교회에 내어 놓고 평양신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가난한 목회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었던 안요한은 그런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가 고등학교를 대전으로 나아가게 되고 주말에만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교회를 가게 되었을 때 이제 사춘기와 겹쳐서 그 아버지에게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저항합니다. 주일 예배시간에 교회 앞문에다가 글을 써 가지고 부쳤어요. 하나님은 계시지 않느니라 안요한복음 11 그 다음주에 또 한 장 부쳤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 네 할애비를 믿으라 안요한복음 12 아주 노골적인 거부요, 저항이었죠. 그러니 그 아버지 목회가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겠어요.

그렇게 거부하고 저항하다가 드디어 대학을 서울로 올라왔어요. 외대 불문과에 들어갔어요. 외교관의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는 그렇게 저항하고 거부하지만 학교에서는 모범생입니다.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는 카츄샤 생활을 거쳐서 미8군에서 근무하고 제대 후에도 미8군에서 이렇게 유능한 사람을 놓칠 수 없다 또 일자리를 줘서 일합니다. 미국 유학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주 창창한 미래가 열려 있는 거죠. 유학을 가기 전에 서둘러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눈에 이상이 생겼어요. 그래서 병원을 다니면서 검진한 결과는 실명한다고 하는 거죠. 이것을 고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6년 만에 두 눈 다 실명하게 되죠. 그 아내도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떠납니다. 혼자 남았습니다. 나이 서른 일곱에 실명을 하고 어둠을 맞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목매어 자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실패했어요. 다시는 실패하지 말아야지. 면도칼을 찾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자기를 돌아봅니다. 누구를 원망할 아무 생각이 없어요. 떠나간 아내에게 조차도 원망이 아니라 마음으로 용서를 빕니다. 그 마음에 있는 떠오르는 사람들,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지워 나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죽으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요한아 그를 부르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갑자기 방안에 환해지고 향내가 나고 요한아 그를 부르는 음성을 또 듣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았는데 너는 왜 스스로를 버리려 하느냐. 내가 너를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겠노라. 구약성경 320면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 말씀을 주셨어요. 그렇게 어둠과 절망 가운데 있던 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그토록 어려서부터 교회를 통해 부모를 통해 들었던 말씀이,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던 말씀이, 때로는 형식으로 기도하고 그저 시늉으로만 했던 그 말씀의 실체가 자기에게 다가오게 된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구나.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그런 감격을 가지고 그 말씀의 증거를 찾으려고 더듬어서 성경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아갔어요.

어느덧 밖은 이른 아침이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정을 합니다. 잠깐 나를 도와 주십시오. 어떤 고등학생이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췄어요. 그에게 이야기 합니다. 자기 사정을 간단히 이야기합니다. 나를 좀 도와 주십시오. 내가 성경을 펴서 들을 수 있도록 그 학생이 교회를 다니는 학생이었는지  책을 받아 들고는 얼른 구약 320면을 펴서 읽어 줍니다. 여호수아서 인데요, 여호수아서 11절부터 읽어 내려갑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쭉 읽어 내려 갑니다. 별 느낌이 없어요. 그런데 여호수아 15절을 읽는 순간 너의 평생에 능히 너를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학생이 계속 지나쳐 읽어가니 그 구절을 다시 한번 읽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마음 속에 기쁨과 평강이 흘러 넘칩니다. 여전히 눈은 보이지 않지만 영의 눈이 열렸어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어요. 그가 잊었던 옛날에 불렀던 찬송이 떠오릅니다.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 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하루 온종일 이 찬송을 감격 속에 부릅니다. 안 보이는 눈으로 드디어 그 집을 떠나갑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을 붙들고 그 부르심을 따라서 나아가요. 그렇게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예비한 사람들을 한 사람, 두 사람 만나요. 시각 장애인 사역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목사가 됩니다. 시각장애인 교회를 시작합니다.

여러분,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소설이죠.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을 만난 한 사람의 구체적 사건이 있고 그것을 소설로 써낸 거죠. 거기에 생명이 있고 감동이 있어요.

우리가 오늘 요한복음을 읽었습니다만 이 요한복음이야말로 또 한 편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그들의 간증이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렇게 시작합니다. 상당히 철학적이에요. 논리적이에요. 그러나 이러한 서술 이전에 기록 이전에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 있었죠. 그들은 다 구약신앙이라는 전통적 종교적인 배경 속에서 산 사람들이에요. 구약을 들은 사람들이에요. 배운 사람들이에요. 그 구약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이 다윗의 후손 메시야를 보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절망적이었어요.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수탈당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억눌리고 있습니다. 도저히 소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신 거예요. 하늘나라를 말씀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을 얘기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가 약속한 말씀이 그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사실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어요. 승천하셨어요. 여기에 사실이 있어요. 그러나 아직 제자들이 온전히 이것을 깨달을 수 없었어요.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믿으려 하지만 믿어지지 않았어요. 혼돈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 마음에 임하실 때 드디어 그들이 말씀을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이제까지 있었던 사건들이 말씀과 연결되기 시작했어요.

예수 믿는 많은 분들이 뭔가 좀 나에게도 뜨거운 은혜와 체험이 있었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 아름다운 소원이죠. 그러나 여러분 어떤 이적이 내 눈 앞에 일어났어도 그거 올바로 해석해야 돼요. 요한복음은 7가지의 이적들로 이뤄졌어요.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 오병이어의 이적 등등 많은 이적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 이적을 보는 사람들이 다 잘못 판단하고 있어요. 오해하고 있어요. 자기들 나름의 선입견과 자기들의 기준을 가지고 그 사건을 해석해요. 그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결론을 내렸느냐 저 사람을 따라가면 굶어 죽을 일이 없다. 저 사람이 행하는 이적을 보니 그는 구약이 예언한 다윗의 후손 메시야가 틀림 없다. 따라 왔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합니까? 너희가 나를 따라온 것은 정말 진리를 발견해서가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러므로 이제는 육신의 배를 채우는 떡만 찾지 말고 정말 너희들에게 필요한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의 떡을 구하라 이적을 봤어요. 그러나 잘못 해석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적 이야기가 나오고 사람들의 오해가 있고 예수님이 다시 말씀해 주셔요. 말씀을 제대로 깨달을 때 그 사건이 제대로 해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축적되면서 우리의 인생관이 되는 거예요. 세계관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이 발견한 결론이 뭐냐, 예수님은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다. 다윗의 후손 메시야다. 그러나 그 메시야는 이제까지 우리가 잘못 알았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해방을 가져다 주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문제인 죄를 해결하시는 분,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해 헤매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알려 주시는 분 그리고 그 분을 따라갈 때 진리를 알게 되고 자유함이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는 참된 메시야다. 이게 그들의 결론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이제 자기가 만난 예수를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됩니다. 특별히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그리스 사람들, 헬라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유대인들하고 문화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들의 철학을 빌어서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그게 바로 로고스예요. 로고스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 철학을 배울 때 듣게 되는 낱말이죠. 이 우주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원인, 그것을 로고스라고 말해요. 사람의 생각과 그 생각의 표현인 말 그리고 그 생각과 표현의 완전한 결정체가 바로 로고스예요. 우주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원리. 그리고 사람의 영혼에는 그 로고스의 씨앗이 심겨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주적인 로고스를 알 수 있다. 그러한 영적 지식을 가질 때에 그는 진리를 알 수 있다. 그게 그리스 사람들의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 로고스를 끌어다가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게 헬라어로 얘기하면 호 로고스 사륵스 에게네토 말씀이 사람이 되어,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결론을 내리게 하느냐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렇게 고백하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는 메시야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게 뜻은 같아요.

그렇다면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어떻게 받아 들여집니까. 한국교회 초기에 외국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보니까 우리나라는 완전히 귀신 천지에요. 대문부터 저 뒤간까지 구석구석에 다 귀신들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까 하다가 이렇게 전했대요. 이 신 저 신 잡신 다 치우고 제일 센 귀신을 믿읍시다. 예수 귀신을 믿읍시다. 예수 이름으로 명했더니 귀신들이 물러가는 거예요. 귀신을 이해하고 귀신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전했던 거예요. 그리고 예수 귀신이 제일 세구나. 사람들이 그 앞에 몰려 왔을 때 그들에게 말씀을 펴서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가 하는 것을 설명했던 거죠. , 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상투도 다 끊어 버리고 도포자락 대신에 양복을 입고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옛날 성경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11절을 어떻게 번역했느냐 하면 태초에 도가 있느니라 했어요. 옛날에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 도를 닦는다고 했어요. 그러나 오늘날 보다 더 현대어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말씀이 계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조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는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어요.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에요. 드디어는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이 그 예수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분이 메시야로구나, 그 분이 그리스도로구나 알고 나서 증거한 말씀을 사도행전에서는 케뤼그마라고 말해요. 그리고 그 시대가 지나간 다음에는 예수 사건을 오늘 요한복음, 마태복음, 사도행전 하듯이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기록된 말씀, 성경이에요. 그렇다면 21세기 오늘 우리에게는 교회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이에요. 즉 설교 말씀이에요.

사실 우리가 다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성경 가지고 예수 믿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됐어요. 성경 기록은 이천 년 전부터 시작됐지만 백 년 전만 해도 태반이 문맹이었거든요. 책은 있지만 읽을 줄 몰랐어요. 그래서 책은 있으나 없는 것과 똑같았어요. 대부분 조각으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복음을 듣고 복음을 이해하고 따라야 했던 거죠. 그러나 이제 교육이 높아져서 드디어 우리도 성경을 펴서 성경을 읽게 되었어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된 말씀이에요.

어디서 하나님 만나야 되느냐. 예배시간에 강단을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을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거예요.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대를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진리를 펼치시기 위하여 기록한 말씀이에요. 객관적인 계시예요. 그런데 이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아멘이 돼요. 그것은 성령께서 오늘 그 시간을 따라서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상황에 맞게 역사하시는 거예요. 주관적인 계시에요.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아직 믿어지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말씀과 성령이 내 마음 속에서 만나서 그것이 아멘이 되느냐.

제가 며칠 전에 천년학 이라고 하는 영화를 봤어요. 이게 어떤 영화냐 하면 한 10여 년 전에 서편제라고 하는 영화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서편제라는 영화를 다시 한 번 새롭게 찍은 거예요. 제가 대학때 사학과를 다녔기에 언젠가 한 번 34일로 경상도, 전라도 해가지고 남도 답사를 학과에서 간 적이 있었어요. 전주인가 갔을 때에 저녁식사를 할 때 소리하는 사람을 불렀어요. 그래서 소리를 들었는데, 저는 그때 무슨 노래를 하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서편제라는 영화를 훨씬 후에 보고 나서야 저런 게 있구나 했어요. 그건 참 대단한 영화예요. 왜냐하면 우리 것이지만 우리가 몰랐던 것을 밝혀준 것이니까. 그런데 이번에 십여 년 만에 천년학이라고 하는 영화에 오정해 라는 여주인공이 다시 나왔는데 하나도 안 변했더라구요. 분명히 시집가고 했다는데. 그 비결이 궁금해요. 정말 하나도 안 변했어요. 여전히 매력 있고 예뻐요.

그런데 그보다 영화의 내용이 더 애절해요. 더 공감할 수 있었어요. 이제는 노래만이 아니라 노래 속에 맺혀 있는 소리꾼들의 인생과 그들의 한(), 사람이 산다는 게 뭐냐 하는 물음을 다시 한 번 가지게 되더라고요. 같은 영화를 봤을 뿐인데.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작품이래요. 100번째 작품이니까 뭔가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기고 싶었는데 그가 선택한 게 그 영화예요. 다시 한 번 각색해서 만든 거예요. 그가 왜 그랬을까. 다시 들여다 보면서 그걸 느낄 수 있었어요. 예술이에요.

또 하나는 저 자신이 나이 들면서 삶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가 넓어진 거죠. 산다고 하는 것이 성공을 쟁취하기 위해서 사는 거 아니에요. 물론 그게 필요하죠.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하고 자기가 애쓴 대가를 얻어야 되겠죠. 자녀도 잘 길러야 되겠죠. 사회적인 지위도 중요하고 명예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언젠가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라고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에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이 없다면 그가 가진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허무로 돌아가는 거죠.

여러분, 정말 여러분의 삶 속에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다가오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아직 내가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우스개가 있어요. 사람들이 모두 천국 가고 싶어 한대요. 그런데 죽고 싶지는 않대요. 그래서 천국을 가지 못한대요. 나 자신에 대해서 죽어야 돼요. 내가 쥐고 있는 이것이 순간이고 잠깐이라고 하는 것을 냉정하게 알아야 돼요. 하나님만이 내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통렬하게 고백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은혜를 깨끗하게 받아들일 수 없죠.

이 번에 대통령 선거하지 않았습니까. 사람 하나 바뀌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기대를 가져요. 요즘은 한 시간 내내 그 뉴스예요.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문화도 기대하고. 온통 그에게 기대를 가져요. 그리고 그에게 신뢰를 보내요. 저는 잘 할 수 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청계천 복구한 그것이 바로 그의 실력이라고 보는 거잖아요. 저렇게 복구한 대로 대한민국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해달라고 하는 거잖아요. 신뢰의 근거는 뭡니까. 그가 과거에 이뤘던 그것이 바로 신뢰의 근거잖아요. 앞으로 잘하겠다고 하는 말 잘하는 것은 소용이 없잖아요. 왜 그런가,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우니 경제를 해결해 달라는 거죠. 핵심은 경제였죠. 여러분 새 대통령이 그 문제를 잘 해결해서 우리나라가 잘되기를 저도 일편단심 바랍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가 아닌 것을 알아야 돼요.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다 놓고 가야 돼요. 그러기에 하나님께 주목해야 돼요. 우리가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을 줬어요. 우리가 당신을 믿으니까 장관 임명하는 것도 당신이 다 알아서 해라. 주권을 줬어요. 여러분, 우리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세요. 오늘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수많은 증거와 증인들을 우리 앞에 펼쳐 놓아요. 죽음을 넘어선 생명을 보여 주신 거예요.

여러분, 성탄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을 우리가 기억하는데, 전 이런 생각을 해요. 예전에는 예수님이 살았던 당시에 태어나서 예수님을 따라 눈으로 보고 확실하게 믿었을 텐데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 아기를 덜렁 안고 와가지고 이 아기가 메시야다 하면 그걸 누가 믿겠어요. 여러분인들 그걸 믿을 수 있어요. 그거보다는 성경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부터 그의 공생애와 이적과 말씀과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역사를 다 담아 가지고 체계화한 이 말씀을 보니까 종합적으로 이해가 돼요. 차라리 저는 이걸 택하겠어요.

백십 년 전에 우리나라에 청일 전쟁이 일어났어요. 난리가 났어요. 평양이 불바다가 되고요. 동학혁명도 일어났잖아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때 만약에 평양에 살았다면 그 전쟁을 피해서 이리저리 피난하고 했겠죠. 그러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당최 이게 무슨 일이야 이렇게 묻기는 했어도 이해는 못했을 겁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역사가가 그 사건을 다 연구합니다. 해석합니다. 그래서 그때 일어난 사건이 어떻게 시작됐고 어떻게 끝났으며 그 의미는 무엇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은 무엇이라는 것을 명쾌히 설명하잖아요.

아기 예수를 통하여 임마누엘 사건이다. 이 사건을 믿으라 이거 쉽지 않아요. 그래, 어떡해요. 하나님이 마리아에게도 증거를 주시고 요셉에게도 증거를 주시고 목자에게도 증거를 주시고 이것이 모아지고 묶어지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되고 이러면서 신앙이 싹트게 된 거죠.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사건과 해석 둘 다 주셨어요. 성경이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는 자에게는 약속대로 그 증거가 우리의 마음과 우리 삶 속에 일어 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이건 신비예요. 이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에요. 우리가 그 말씀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을 때 우리 삶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또 한번의 크리스마스를 맞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뜨리시고 주님을 영접하며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환영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