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기뻐하고 기뻐하리라[처칠=자존감정직과원칙투명성예측성유머]/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3. 16:02

071014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1:15-21)

성경본문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1950년대 미국의 한 시골 소녀가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겉봉에 이렇게 썼습니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분에게’ 그런데 그 편지가 배달됐어요. 영국 수상 처칠에게 배달됐습니다. 처칠이 인생 말년에 그렇게 평가를 받았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고 UN 국제연합 창설, EU 유럽연합 창설의 주역이었기 때문이죠. <벼랑 끝에서 만나는 처칠>이란 책이 있습니다. 의외로 이렇게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는 처칠이지만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인생역전이에요.

그의 아버지는 서른일곱 살에 영국 최연소 재정부 장관에 오른 사람이었어요. 아주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자기 아들에 대한 평가는 아주 냉혹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귀족들은 목사가 되든지 변호사가 되든지 군인이 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처칠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어요. ‘목사가 되기에는 성격이 안 좋고, 변호사가 되기에는 머리가 안 좋다.’ 또 그 어머니는 귀족 사교모임에 깊이 맛 들어가지고 자녀들의 양육에 무관심했어요. 보모들에게 맡겼고 그나마 7살의 처칠을 기숙학교에 보냈어요.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결혼했을 때에 그 부부는 어느 부부 못지 않게 아주 대조적인 사람들이었어요. 처칠은 좀 헤프고 사교적이고 덜렁대는 성격인데 비해서 그 아내는 아주 구두쇠요 비사교적이고 완벽주의자였기에 부부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 그가 학생으로 자랄 때에 성적이 지극히 부진했어요. 공부에 소질이 없었어요. 고집도 세서 좀처럼 선생님들에게 머리를 굽히지 않았어요. 당대 영국의 엄격한 교육제도 아래서 매를 맞으며 자라야 했습니다. 그가 사관학교를 들어가려 했는데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삼수를 했어요. 그나마도 마지막 시험에 영연방 나라 지도를 그리는 문제가 매년 출제됐는데 포기하는 마음으로 뉴질랜드 지도 하나를 준비했는데 그만 시험문제에 그게 딱 나와 가지고 턱걸이 해가지고 사관학교에 들어가서 군인이 되었습니다.

 돈에 관해서는 나이 팔십에 회고록을 써서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까지는 한평생 빚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성적이어서 외로움을 깊이 느꼈고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면 갑판에 나가지 않았답니다. 자기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물에 뛰어들까봐 스스로 겁을 내었다고 합니다. 그는 결코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비록 장수했지만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평생 폐렴을 안고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지만 그의 삶을 들추어보니 많은 문제를 끌어 안고 살았던 것이죠.

 이러한 문제를 안고 살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세운 원칙이 있어요. 처칠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을 압축해서 말한다면 자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그리고 원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군인이 되고 정치가가 되었기 때문에 수상을 목표로 놓고 시행착오와 연단 끝에 예순여섯에 수상이 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사람은 늙기로 작정한 그 순간부터 늙는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노익장을 과시했죠. 또 나중에 75세가 되가지고 다시 수상이 되죠.

그는 인간의 고유한 자유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졌어요. 나치 독일이 평화협상을 제의했을 때, 처칠 이전의 챔벌린 수상은 유럽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 나치의 평화협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많은 양보를 하게 됩니다. 그는 평화주의자라고 당대에 칭송을 받았지만 2차 대전이 일어남으로 그의 평화추구원칙은 헛된 것이 되어버렸죠. 처칠은 나치와의 평화협상을 거부합니다. 전 유럽이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영국이 공습을 받는 그런 위기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싸우기를 결정합니다. 전세가 지극히 불리할 때에도 국민들에게 속이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열어 보입니다. 함께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서 이 위기를 극복하자고 호소하게 됩니다. 정직과 원칙,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이다 라고 하는 투명성, 그리고 예측 가능한 정치를 펼쳐나갔던 것이죠.

그는 늘 어려움이 있는 현장을 지킵니다. 그러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붙들어요.  수많은 비난에 대해 자기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처칠은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2차 대전을 맞이해서 미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미국에 건너갔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회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호텔에 머물면서 목욕을 하고 큰 수건으로 몸을 두르고 나와서 의자에 앉았는데 갑자기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립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예고도 없이 그의 방을 들어온 거예요. 깜짝 놀라가지고 일어나는 바람에 그만 수건이 스르륵하고 흘러내렸습니다. 알몸이 다 드러났어요. 그때 처칠은 씨익 웃으면서 “각하, 영국의 수상은 이와 같이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답니다.”했다는 것이죠. 어떤 위기 속에서든지 흔들림이 없었던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단 하나, 신앙에 대해서는 좀 아쉽더라구요. 인간의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지나쳐서 당시 영국 교회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이었어요. 그는 무신론자는 아니었지만 교회의 관습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고백하고 신앙했죠.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만약에 처칠이 인간의 자유함이 복음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는 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으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마는 거기에 복음의 자유함이 있었다면 그의 삶은 더 풍성해지지 않았겠는가.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영어로 ‘Paul’이잖아요. 그래서 우리 한국 목사님들 가운데서도 영어로 자기 이름을 짓는 분들이 Paul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저도 예전에는 제 이름을 Paul이라고 할까 이렇게 생각도 했어요. ? 성경의 인물 중에 사도 바울만한 인물이 없어요. 심지어는 도대체 그리스도교는 예수교냐 바울교냐 라고 말할 정도로 바울은 예수 그분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신학적으로 해석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모든 목회자들의 우상이에요. 그러나 성경을 정확하게 읽는다면 오늘날 사도 바울을 높이듯이 당대에는 죽기 전까지 이런 평가를 받지 못했어요. 그는 끝없이 핍박 받았어요. 결국 순교하기까지 했어요. 심지어는 많은 교회 내에서도 사도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오늘도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거예요.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의 외모는 대머리에다가 키도 작도 매부리코에다가 다리도 구부러지고 또 고린도후서 10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기 때문에 글은 멋있지만 막상 만나서 말을 들어보면 무슨 소리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평가가 있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에 대한 실상일 수도 있고 또는 좀 폄하하는 평가일 수도 있죠.

오늘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는 이유는 그저 좋은 일로만 쓰는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를 사도 바울이 세웠는데 세월이 많이 지나서 사도 바울이 지금 로마 감옥에 앉아서 소식을 들어보니까 빌립보 교회가 복잡해졌어요.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마침 빌립보 교회에서 옥에 갇혀있는 사도 바울을 위해서 먹을 것과 옷가지를 사람을 통해서 보냈어요. 그것을 받고서 편지를 써서 자기가 사랑하는 디모데의 손에 들려서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던 빌립보 교회가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서 저들의 신앙을 뒤흔들고 있어요. 또 빌립보 교회 안의 일꾼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어요. 이러한 문제들을 편지를 통해서 쓰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에 대한 별의별 이야기가 다 들려와요. 그런데 사도 바울과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갇힌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저를 대신해서 그 몫까지 더 힘써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또 다른 선교팀에서는 내심 드러내지는 않지만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힌 것에 대해서 기뻐하면서 이틈에 우리가 더 열심히 해가지고 세력을 확장하자 이런 소식도 들려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오늘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깨끗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어떤 사람들은 경쟁하는 마음으로 시기하는 마음으로 그릇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구나. 그러나 좋다, 모양으로 하든지 진심으로 하든지 그리스도만 전해진다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래서 빌립보서의 별명이 ‘희락의 복음’ 이예요. 기쁨의 복음이란 말이에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이렇게 말한 사도 바울은 나중에 빌립보서 4장에 가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이게 예수 믿는 사람의 궁극적인 모습이에요. 저와 여러분이 모두 예수를 믿고 사는 목적이 뭐냐, 큰 집을 짓는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어떤 일을 당하든지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그런 마음의 집을 짓는 인생이 되어야 할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서 자그마한 음식과 옷가지를 받았어요. 그러면서 그것을 아주 고마워합니다. 사실은 그게 너무 소홀한 거였어요. 진작에 보내서 도왔어야 했는데 자기들 싸우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뒤늦게 어설픈 선물이 온 거예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해요. ‘여러분이 나를 도우려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는데 그 동안 기회가 없었느니라.’ 이 얼마나 넉넉한 마음이에요.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에요. 편지를 쓰는 목적은 내 형편을 여러분에게 알림으로 여러분의 걱정을 더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뻐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여러분도 기쁨을 더하고 근심을 내려놓도록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노라. 여러분, 이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간혹 우리 교인들 중에서 저에게 “목사님 여기서는 건강을 위해서 골프를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 권하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시더라고요. 제가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 건강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걸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요. 골프가 만약에 시시한 거라면 저한테 권할 리가 없잖아요. 가만히 그 말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움이 있으신 것 같아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우리 목사님은 골프의 재미를 전혀 모르신단 말이야. 삼삼한 그 맛을 모르고 계시단 말이야.  답답한 거예요, 지금. 그 맛을 알면 다를텐데. 제가 예전에 탁구를 친구들과 어울려 치다가 푹 빠지니까 뭐 다른 건 아무 생각이 안나더라고요. 이해가 되더라고요. 바둑하는 사람들은 천장만 봐도 바둑판으로 보이고 그렇죠. 그런 고비가 있죠. 그래서 저도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 교회식구들이 마음이 좀 넉넉해져 가지고 나중에 제가 골프를 할 때에 반드시 미치는 때가 있겠죠. 골프를 하는데 맹숭맹숭 하다면 그거 뭐 하러 하겠습니까. 미친듯이 돌아가는 때가 있어야 그게 제대로 하는 것이고 정상이지요. 그럴 리는 없겠습니다만 제가 골프하다가 예배 늦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혹시. 그럴 때라도 우리 목사님 요즘 골프하다가 저러시는 거니까 우리가 이해해야 돼.’ 그런 분위기가 될 만하면 제가 할까 생각합니다. 그런 분위기가 아니고 눈꼬리가 올라가고 그러면 지레 안 하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어요. 제가 고등학생 때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던 반주자 누나가 말이죠, 어느 날 교회에 안 온 거예요. 연애하고 있었거든요. 제 아버님이 장로님이셨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아버지, 반주자 누나가 오늘이 주일인데 예배도 안 왔네요.” 그랬더니 저희 아버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너도 나중에 연애해봐라.” 저도 겪어보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노라. 이제 한 걸음 더 나가서 이렇게까지 말했어요. ‘죽든지 살든지 그저 나는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겠노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겠노라.’ 이렇게 고백한 거예요. 그러면서 다투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렇게 다투지만 말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또 빌립보서 3장에 가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내가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공부하고 가문도 좋고 율법에 대한 열심도 있고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지만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보니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지식이더라.’ 이게 사도 바울의 고백이죠.

몇 년 전에 우리 노인대학에 아주 재미있는 분이 오셨어요. 한국에서 잠깐 들리셨는데 굳이 우리에게 청해가지고 강의를 하시겠다. 그래서 어르신들을 다 모아가지고 강의를 했는데 무슨 강의를 했냐면 ‘요료법’ 강의를 했어요. 요료법이라는 게 뭡니까. 자기의 오줌을 마시면서 건강을 관리하는 거예요. 이게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는 거예요. 오줌은 혈액이 콩팥을 거치면서 여과된 생리활성물질이다. 자기 몸에서 나온 거라 전혀 부작용이 없다. 하루에 200ml 여섯 컵을 마시고 눈도 닦고 콧구멍도 닦고 양치질도 하고 얼굴 마사지도 하면 몸이 다 살아난다는 거예요. 그분이 18년 동안 그렇게 하셨다는데 그때 팔십이 넘으신 분이 정말 탄력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아무도 안 믿어요. 그 자리에 모인 분들이 다 말씀은 맞습니다마는 오줌을 얼굴에 바를 생각은 없습니다, 하물며 오줌을 마신다니요.’ 저도 해볼까 생각하다가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으니까 다른 방법을 해보자 생각했어요. 그렇게 효과가 확실하지만 그분이 그야말로 요료법 교주가 되셨는데 이제 신자가 한 사람 생겼어요. 자기 부인이 몇 년 전부터 동참하시더라고요. 어려운거죠. ? 우리의 인식이 있고 문화가 있고 관습이 있으니까. 그게 분명 몸에 좋아요. 틀림없어요. 그러나 어떤 사람이 따라가느냐. 제가 보니까 골병든 사람, 이제 당신은 다른 방법으로 안 된다 하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하겠죠. 여러분, 그래서 예수 믿을 때 고난이 있는 거예요.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가 좋아도 우리는 어리석어서 ‘아휴 이만하면 됐지. 이만큼 벌고 사는데.’ 그러는 거예요.

‘이면우’교수라고 여러분 잘 아시지 않습니까. <W이론을 만들자> 벌써 1993년 얘기에요. 1995년에 또 다른 아이디어를 묶어서 낸 <신사고이론>이란 책이 있어서 우연히 발견해서 읽었는데, 정말 기발한 분이에요. 그 중에 하나 소개해드릴께요. 작년 이맘 때의 생각하고 지금 내 생각이 똑같다면 나는 1년 동안 영안실에 있은 셈이다. 뻔한 회의를 또 하고 있다면 그건 영안실에 들어가 앉아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아무런 발전이 없다면 나는 영안실에 1년 간 있은 거예요. 그러고 1년 목숨을 부지하는 게 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짓에 스스로 속은 것이죠. 분명 언젠가 내가 죽는 날이 있을 터인데 그날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노라. 주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단이 회의를 했습니다. 어떡해야 사람들을 지옥으로 더 많이 집어넣을 수 있을까. 부하들과 회의를 했어요. ‘아이디어를 좀 내봐라.’ 한 부하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좀 강하게 얘기할까요?’ 그랬더니 사단이 ‘그건 이미 오래된 수법이다. 그건 통하지도 않는다.’ 다른 부하가 말합니다. ‘그럼 지옥이 없다고 얘기해가지고 사람들로 더 죄 짓고 살게 할까요?’ 그랬더니 ‘이미 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들은 지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차라리 이번에는 반대로 고통을 줄까요?’ 그랬더니 ‘고통을 주면 안 된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 막 하나님을 붙들고 심지어는 순교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나오니까 하지 마라.’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할까요?’ 끝내 기다리던 사단이 스스로 말합니다. ‘너희들을 믿느니 차라리 내가 해야 되겠다. 서둘 것 없다. 천천히 예수 믿으라고 해라.

여러분, 어제와 아무런 변화가 없는 오늘은 죽은 거예요. 내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 한번 깊이 생각하고 내 신앙을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우리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명절을 맞이해서 모처럼의 휴가를 가지고 쉼을 가지고 여기저기로 다 흩어져 있습니다. 모처럼 일상을 멈추고 머물러 있는 이 시간에 나 자신의 삶을 깊이 돌아보고 앞으로 내게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또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지혜를 얻고 뜻을 세우고 다시 한 번 새롭게 출발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