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24) 거짓 교사(이단)에 대한 경계와 경고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4:17

"Ⅱ. 이단에 대한 경고②"
-거짓 교사(이단)에 대한 경계와 경고-

빌립보서 3장1~21절
석원태 목사


  Ⅱ. 이단에 대한 경고(빌 3:1-21)

  1. 주(主) 안(內)에 있는 기쁨의 불멸성(빌 3:1)

  2. 거짓 교사(이단)에 대한 경계와 경고

  바울의 영감은 유대주의적 율법주의 교사들에 대하여 세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 개들을 삼가라(빌 3:2).

  「개들을 삼가고」라고 했다.
  여기 ‘개’, ‘쿠나스’(ku,naj)는 오늘 문명사회에서 사랑받는 동물로 여겨지는 애완용 개의 개념과 정 반대이다. 당시 사회에서 ‘개’라고 하면, 들개였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때로는 떼를 지어 쓰레기통을 뒤지고, 음식 찌꺼기를 서로 물고 으르렁대는 것들이었다. 물론 관리하는 주인도 없고, 일정하게 머무는 장소도 없는 동물이었다. 때로는 뭉쳐 다니면서 서로 물고 뜯는 싸움도 잘 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병든 거지 나사로의 헌 데를 핥는 개도 이런 종류에 속한다(눅 16:2). 성경 중에서 짐승이 나올 때 개는 언제나 최하의 동물로 취급되었다. 사울 왕이 다윗의 생명을 노리고 그를 추격하고 있을 때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삼상 24;14, 시 22:16, 20)라고 하는 경우 다윗 자신의 비천을 두고 한 말이다.

  신명기 23장 18절에는 개와 창부는 가치 없는 존재이고, 개 값과 창부의 몸값은 하나님 성전에 바칠 수 없다고 했다. 요한계시록 22장 15절에는 ‘개들은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함으로 영적 불결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인의 사상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마 7:6)고 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이방인 특히 헬라인들을 개라고 했다(마 15:27).
  종합하면, 개는 불결, 비천, 비양심, 탐욕, 이기주의 등을 비유하는 데 사용된 동물이다. 자기 수치를 모르는 파렴치한의 경우이다.
  바울은 지금 이 말을 유대주의적 율법 교사들에게 사용한 것이다. 유대인, 선민, 율법, 아브라함의 자손 등의 혈통적, 국민적 우위성을 앞세워 그리스도의 복음을 도전하고, 방해하며, 물질에 탐욕을 품고, 자기 수치를 모르는 이기주의적 유대 교사들에게 이 말을 사용했다.
  길들일 수 없는 자기 방종 속에서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유대주의적 교사들이 바로 개들이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결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개라고 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인 너희 자신들이 개라고 한 것이다. 율법주의적 유대 교사들은 ‘개’라고 했다.
  「삼가라」고 했다. 이 말은 다음에도 계속 세 번이나 반복된다. ‘삼가라’의 헬라어 ‘블레페테’(Ble,pete)는 ‘보라’라고 하는 명령형으로 어떤 대상을 향해 ‘눈길을 던져라’, ‘주의하라’(마 13:23), ‘숙고하라’(막 12:14)는 의미이다. ‘예사로 넘기지 말라’는 뜻이다. 엄밀히 관찰하고, 숙고하고, 분별하라는 뜻이다. 경계를 멈추지 말라는 명령사이다.

  2) 행악자들을 삼가라(빌 3:2).

  이 말은 ‘개들을 삼가라’는 말의 설명이다. 행악자란, ‘악한 일꾼’을 뜻한다. 복음을 위해 일한다는 미명 아래 자기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무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빌립보 교회 안에 분규를 일으키고(빌 1:15), 고린도 교회에서는 자칭 사도를 가장하여 거짓 교훈을 전파했다(고후 11:3).
  유대주의적 교사들은 언제나 자기들만이 옳은 일, 의로운 일을 하는 자들이라고 자부했다. 율법을 지키는 일, 율법의 세칙을 만들고 따라 행동하는 것,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법칙과 조례들을 지키는 일이 바로 의를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의 영감은 이러한 유대주의적 의야말로 그것이 바로 ‘행악’ 하는 일이라고 규정했다. ‘악한 일꾼’이라고 못 박았다.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단순한 복음을 혼잡하게 만드는 그릇된 일꾼들이라고 했다.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가리켜 ‘남을 속이는 자’(고후 11:13)라고 했다. 저들은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복음 운동에 말할 수 없는 해를 끼치는 자들이었다.

  3) 손 할례당을 삼가라고 했다(빌 3:2).

  여기 「손 할례당」이란 몸의 양피를 잘라서 행하던 할례를 말함인데 직역하면 ‘훼상당’이라고 할 수 있다. 몸에 ‘상처를 낸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나 할례는 육체에 붙인 표에 불과하다. 만약에 인간의 몸에 행하는 그 어떤 표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공로가 되고, 구원을 얻는 빙거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행득구주의의 이단이 되는 것이다. 이방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고행주의 같은 것이 된다.
  유대인들은 저들의 몸에 행한 할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어떤 힘이 되고, 공로가 되고, 가치가 된다고 착각했다.
  당시 빌립보 교회나 여러 기독교 복음 사역들 안에 이런 유대주의적 거짓 교사가 많이 있었다. 바울은 이런 종류의 거짓 교사들을 지칭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다’고 했다(빌 3:18).
  그래서 빌립보서 3장 3절에 바울은 참 할례당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다. 크리스천들은 몸에 어떤 외적인 표시나 육적 표시에 따르지 않고, 오직 영적이고, 내적인 표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마음의 할례, 생각의 할례, 입술의 할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b)고 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있는 「내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 같은 류가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참 할례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이라고 했다(빌 3:3).
  크리스천의 삶은 신령과 진정(진리)이다(요 4:23). 여기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말 ‘라트레이아’(latre?α)는 하나님을 향한 공동체적 예배(공중예배)를 가리킨다. 그 예배는 성령과 진리(진정)로 드리는 예배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놀라운 신약 예배의 생명성을 말씀하셨다. 성령과 진정, ‘알레떼이아’(avlh,qeia)로, 예배, ‘프로스퀴네오’(proskune,w) 곧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것(빌 3:3)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단 하나의 자랑, 오직 하나만의 자랑이 있다.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행했느냐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고, 그리스도가 자기(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주었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속죄 제물로 주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경건치 아니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확증했다는 사실이다(롬 5:6-8). 이것이 참 할례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와 긍휼, 곧 십자가 대속의 사랑이 우리가 받은 할례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랑’이라는 자신의 애용 단어를 그의 서신에 35회나 사용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만 자랑한다. 이것이 참 의의 조건이기 때문이다(고전 1:31, 롬 8:1). 이것이 참 할례이다.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빌 3:3)이라고 했다.
  이는 육체를 신뢰하는 유대주의적 할례주의와 대조시키는 말이다. 유대인들이야말로 육체주의자들이었다. 혈통주의자들이요, 종교의식주의자들이요, 율법주의적 도식행위자들이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육체에 상처를 내어 그 표식을 앞세우고 자랑하는 자들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육체를 앞세우지 아니한다. 그 육체는 사실상 본질적으로 허물과 죄로 이미 죽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엡 2:1-3). 참된 할례인들인 크리스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본다. 새롭게 된 피조물인 나를 본다. 그곳에는 옛 것은 이미 없어져 버린 상태이다. 오직 은혜와 긍휼 안에 있는 나를 보는 자이다.
  크리스천의 참 할례는 성령으로 드려지는 예배(봉사), 그리스도 예수만 자랑하는 것, 자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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