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칼럼; 설교원고모음 5414

성경에 나타난 일꾼의 어원적 의미 [홍종찬 목사]

성경에 나타난 일꾼의 어원적 의미 홍종찬 목사 일꾼의 사전적 의미는 “품삯을 받고 남의 일을 하는 사람”, “일을 능숙하고 솜씨 있게 잘 처리하는 사람”, “일정한 부문에서 어떤 일을 맡아서 하거나 할 사람”입니다(다음 어학사전). 이를 정리해 보면, 품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일당이나 월급을 받는 노동자나 노무자를 말하고, 일을 능숙하게 잘하는 사람은 숙련공 혹은 기술자를 가리키며, 어떤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은 책임자나 감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일꾼입니다. 성경에도 “일꾼”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구약에서는 주로 “종”이란 말로, 신약에서는 “일꾼”, “종”, “집사” 등으로 사용했습니다. “일꾼”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者)와 예속(隸屬)되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도 있었는데, ..

믿음의 경주자로 살아가기 [홍종찬 목사]

믿음의 경주자로 살아가기 홍종찬 목사 사람들은 인생 여정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마라톤은 42.195㎞를 쉼 없이 달려 결승선을 통과해야 하는 경기(競技)입니다. 마라톤의 의미는 완주하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중도에 포기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자의 삶도 경주(競走)와 같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끝까지 달려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신앙의 결승선을 통과해야 합니다. 만약, 중도에 포기하거나 다른 코스로 가서 피니쉬 라인(Finish Line)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면류관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운동선수는 승리를 위해 피와 땀을 흘리며 끊임없이 훈련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경건의 삶을 위해 끊임없이 참고 인내하며 훈련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승리..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패한 것이다. [봉민근]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패한 것이다. 글쓴이/봉민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에 그 어떤것으로도 비교할수 없는 완벽하신 하나님이시다. 어찌 사람이 만든 우상과 비교 하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시한 하나님이 아니다. 완벽 하시고 절대적이시며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다. 기독교인의 못된 신앙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부끄러워 기죽어 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우상과 짜퉁 신을 믿는 사람들 앞에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극치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인하여 늘 감탄이 넘치는 삶이다. 무덤덤 하고 하나님이 하신 그 신묘막측 하심에 대하여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자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주님만이 하실수 있는 일에 대하여 찬양 할줄 모르는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 [봉민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 글쓴이/봉민근 누구에게나 귀는 있다. 그러나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들어도 알지 못하는 인생은 우매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함이다. 성령에 이끌리지 않으면 열심만 남고 역사는 없다.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고 죄에 매몰되기 쉽다. 기도를 통하여 말씀을 깨닫고 성령에 의탁하며 살기를 생활화 하라. 매순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우리를 그냥 놔두지를 않는다. 세상에 가장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무릎 꿇고 무릎으로 사는 사람이다. 가난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주린 자가 복이 있음은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이..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단다 [봉민근]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단다 글쓴이/봉민근 모든것이 주께로 부터 왔다. 내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내 집, 내 땅도 이전에는 남의 것이었고 이후에는 또 다른 사람이 차지하여 주인 노릇 하다 갈 것이다. 나의 육신 마져도 그 주인인 땅에게 돌려주고 내 영혼도 영혼의 주인이신 주께 돌려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다. 그냥 이 땅에 온 자는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음은 하나님은 무 계획적으로 사람을 세상에 보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나를 쓰시기 위해 만드셨고 만드신 후에는 나를 사랑하시며 나와 함께 동행하시며 일하신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을 이용하고 쓴 다음 버리고 비웃으며 조롱하는 못된 존재다. 가룟유다가 마귀에게 쓰임받고 버림 받았다. 자살하는 순간에도 비웃으며 자신의 승리를 자..

신앙의 열매가 없다면 거짓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봉민근]

신앙의 열매가 없다면 거짓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글쓴이/봉민근 성도는 천지가 변해도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믿노라 하면서 제 힘으로 살려고 하는 것은 불신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겉과 속이 같은 성도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 성도는 말과 생각과 생활을 통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수십년 믿고도 그 열매가 없다면 신앙생활 헛 한 것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신앙의 열매가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라. 열매 맺지 못한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짐을 알아야 한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는 주님의 저주를 받아 말라 죽었다. 내가 신앙생활 잘 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믿음 있는척 하며 자랑하지 마라. 열매 없는 신앙은 거짓 신앙이다. 은혜는 잘 받는데 감사가 없다면 감사의 열매가 없는 것..

말씀이 이끄는 삶을 살라 [봉민근]

말씀이 이끄는 삶을 살라 글쓴이/봉민근 내가 말씀을 붙잡고 사는것 같아도 결국은 말씀이 나를 이끄신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나의 변덕스러운 생각이 어떻게 변할지 내가 곧 당할 한치의 앞길도 나는 알수가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것을 그대로 받아 드리고 순응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다. 믿음이 좋은것 같다가도 시련이 오면 한없이 추락하는 것이 바로 나다. 갈릴리 호수에 노저어 가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다. 주님이 계셔도 풍랑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풍랑이 일어나도 주님이 계시면 실패는 없다. 인생에 풍랑은 믿음을 측정하게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삶은 두려움에 처하게 된다. 믿음은 맡기는 것이다. 비록 감옥에 갖혔던 베드로는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천사가 흔들어 깨울 ..

양심있는 신앙생활 [봉민근]

양심있는 신앙생활 글쓴이/봉민근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거울을 주셨다. 양심은 나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요 현미경이다. 죄를 지으면 찔리고 옳지 않은것에 가책을 준다. 하나님이 양심을 통해서 아니라고 하면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양심도 덩달아 즐겁고 영혼도 맑아짐을 느낀다. 성령님은 끊임없이 양심을 통하여 말씀 하시고 심령을 감찰 하시며 조명하고 계신다. 화인 맞은자는 죄를 지어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쯤이야 하고 그냥 넘어간다. 성도는 주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자 들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가 왕노릇 한다면 모순이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죄가 왕노릇 한다는 것은 아직 죄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 연고다...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창골산 봉서방 제1232호]

창골산 봉서방 제1232호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명심하라.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고 순간순간 자각하라. 한눈 팔지 말고, 딴 생각하지 말고, 남의 말에 속지 말고, 스스로 살피라. 이와 같이 하는 내 말에도 얽매이지 말고 그대의 길을 가라.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이런 순간들이 쌓여 한 생애를 이룬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라. 너무 긴장하면 탄력을 잃게 되고 한결같이 꾸준히 나아가기도 어렵다. 사는 일이 즐거워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라. 묵은 수렁에서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라./자료ⓒ창골산 봉서방 겸손 겸손은 마음이 완전히 조용해진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며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의아해하지 않는 것이고 ..

주님의 죽으심 [봉민근]

주님의 죽으심 글쓴이/봉민근 십자가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 준 사건이다. 죄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 하면서 운명 하신 사건은 인간은 도저히 이해 하거나 해석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다.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는 선종이니, 서거니 하면서 높이건만 주님의 죽음을 극존칭으로 표현하는 것을 별로 본 일이 없다. 옛날에는 황제나 천자의 죽음을 崩(붕)이라 하고, 제후나 임금의 죽음 뒤에는 薨(훙), 고관대작의 죽음은 卒(졸) 그리고 일반 서민의 죽음은 死(사)또는 亡(망), 역적이나 패륜아의 죽음은 斃(폐)라고 했다. 주님의 죽음을 아파 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 흔한 사회장이니 국민장이니 국장 같은 화려한 장례식이 아닌 그야말로 초라한 짝이 없는 장례였다. 그러..